지난겨울 두 달 반, 무엇이 남았는가?
ai의 도움을 받아서, 광고 시나리오 두 편과 브이로그 시나리오 한 편, 그리고, 사부작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한편을 썼다. 두 편의 광고 시나리오는 클로드, 네오 바나나 프로, 베오 3를 사용해서 동영상을 만들어서, 합평 비슷한 것을 했다. 브이로그 시나리오를 통해서는 ai를 제대로 다루려면, 역시 스스로가 해당 분야에 정통해야 ai 의 오류를 잡아낼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는... 가르치는 사람들의 위선과 무능, 무계획성을 구체화시키는 계기였다고 해야 하나...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나의 부족함을 지적해 주고 메워주는 동료를 얻은 것은 큰 수확이겠다.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경험을 했지만, 각자 느끼고 깨우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머리로도 알고 있고 여러 번 경험해 봤지만, 매번 겪을 때마다 새롭다.
얼마 전에 인도의 고대 사원의 부조물을 찍은 사진을 보았다. 붓다가 옆으로 누워 열반에 든 시체 옆에 막깔리 고살라가 서있는 모습을 조각한 것으로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최근의 경험 때문인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고대 인도 동북부를 중심으로 내려오던 슈라마나(Shramana, 사문) 전통은 여럿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고행을 했던 것 같다. 불교와는 이란성쌍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자이나교(Jainism)의 마하비라(Mahavira)는 13년간 고행을 하고, 케왈라 즈냐나(Kevala Jnana)을 얻어 모크샤(Moksha, 해탈)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붓다도 6년간 고행을 했다. 막깔리 고살라(Makkhali Gosala)는 자이나교의 마하비라와 같이 6년간 고행을 했다.
세 사람이 수행한 고행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같은 경험(고행)을 한 세 사람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마하비라는 고행을 가장 철저히 수행해서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자이나교를 창시했고 죽을 때까지 나체로 지냈다. 붓다는 잘 알려진 대로 고행을 그만두고 깨달음을 얻고, 삼사라(Samsara, 윤회)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막깔리 고살라는 마하비라와 결별한 다음에, 사람의 운명은 노력이나 인연에 의해서 바뀌지 않고, 윤회나 해탈을 포함한 모든 것은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행위의 도덕적 결과를 부정하여 선행이나 악행이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교리를 갖는 아지비카(Ajivika)교를 창시했다. 이 아지비카교는 아쇼카왕 시대까지 인도 남부에서 성행했다.
마하비라나 붓다의 선택에는 의문이 크지 않다. 그러나, 막깔리 고살라에 대해서는 의문이 크다. 내가 단순해서 그럴 수도 있는데, 숙명론자에 결정론자, 도덕부정론자인 사람이라면, 쾌락주의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자들에게 금욕과 고행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 않나? 내 행동과 선택과는 상관없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데, 왜 금욕을 하고 고행을 하도록 가르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