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숙취로 인한 갈증으로 깨어나서 찬물을 마시면서 창밖을 보니 아침 햇살이 짜증 날 정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머릿속은 깨기 직전까지 꾼 꿈에 대한 의문으로 어지러웠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무한 반복되는 이상한 꿈.
아침을 먹고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많이 끼친 기록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야...
미리 약속된 술자리도 최대한 취소하고 업무상 참석해야 하는 술자리만 가겠다고 마음먹어 본다.
술 마시고 사고 친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도 술을 마시러 가야 한다. 약속을 연기하고 싶었는데, 약속 상대방의 일정상 연기를 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나는 오늘 딱 맥주 한 잔만 받아마신다고 미리 이야기해서 양해를 구하기는 했는데 과연 지켜질는지 모르겠다.
이 분하고 술을 마시면 위험(?) 한 것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첫 잔은 무조건 폭탄주를 마시는 거다. 맥주와 소주를 1 대 1로 마는 무서운 폭탄주. 건설과 토목 쪽에서 오래 계셨던 분들도 이렇게 말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평생을 학교 선생만 하시고 은퇴하신 분이 학교 회식 때 늘 이렇게 마셨다고 하시니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하나는 오래된 선생질(?)의 공력으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와서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게 되는데, 맞는 말씀이 대부분이지만, 술자리에서 오래 듣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라, 듣고 있다 보면 그 자리에 동석한 모두가 괜히 술을 마시게 된다는 거다. 이 분은 술이 너무 세서 아직까지 술에 취해 발음이 꼬이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마치 방송국 아나운서같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정확한 발음이 술자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된다. 과연 나는 버텨내고 술을 자제할 수 있을까?
약속은 저녁이니 그때까지 일이나 하려고 노트북을 켜보고 어젯밤 꿈에 외할아버지가 계속 나온 이유를 알았다.
새벽에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적어두었는데, 내용이 가관이 아니다. 꿈에 나온 외할아버지와의 일화와 소회가 적혀 있는데, 그 뒤에 적혀있는 대부분의 내용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뒤범벅된 욕설 덩어리다. 설마 이걸 블로그에 올린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하며 확인을 해보니, 다행히 올리진 않았다. 이걸 올렸으면, 나의 저열한 인성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흑역사가 만들어졌을 텐데...
37년 전 여름밤, 독서실에서 돌아온 나는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외할아버지 댁에 갔다. 낡은 옛집을 새로 지으신 뒤에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외할머니의 제사를 지내겠다고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에 돌아오셔서 제사를 지내신 다음에 병원에 입원을 거부하고 집에 머물고 계셨다. 외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니 외할아버지께서 그 늦은 밤에 찾아온 사위와 외손주를 흐트러진 모습으로 맞이할 수 없다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계셨다. 옆에는 근처에 살고 계시는 네째 외삼촌이 앉아 계셨는데, 기력이 쇠하셔서 목소리가 작아진 외할아버지의 입에 귀를 대시고 이야기를 전해주시고, 우리가 하는 말을 외할아버지 귀에 대고 전달해 주셨다.
그날의 대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아버지가 외할아버지께 이제 제사도 지내셨으니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떠냐고 여쭈셨고, 외할아버지께서는 이제 해야 할 일은 다 했고, 특별히 미련이 남은 것도 없으니,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때가 되면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차분히 정리하고 가라고.
한 시간 정도 대화를 나누고, 집에 돌아왔고, 그다음 날 새벽에 외할아버지가 소천하셨다고 전화가 왔다.
이날의 대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 혼자뿐이다.
네째 외삼촌은 내가 일본에 살며 일을 하던 시절, 고엽제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전해 듣기로는 입원 초기에는 굉장히 괴로워하고, 두려워하셨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담담히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시고,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의 투약을 거부하시고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내가 일본에 살며 일을 하던 시절에 쓰러지셨고,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신 뒤에 암세포가 뇌를 포함한 전신에 다 퍼져있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 깨어난 아버지에게 상태를 전달한 것은 형이었다. 형의 말로는, 아버지가 곧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셨지만, 바로 형에게 유언과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밝히셨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돌아가시는 마지막 날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의식이 아직 있던 때에 곧 맞이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
언제부터인가 '살레카나(Sallekhanā)'와 '좌탈입망(坐脫立亡)'를 의식하게 된다. 나에게는 죽음이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