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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수집가 Feb 13. 2024

십분(十分), 9분보다 1분 많은 10분은 아니고요.

십분(十分)

시간의 수치로서의 10분이 아닌, 부사로서의 십분(十分)

10분은 긴 시간일까요, 짧은 시간일까요? 바쁜 아침, 출근이나 등교를 준비할 때에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고, 설레는 여행을 떠나기 위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일 수도 있으며, 오랜 시간 고대한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있는 순간에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너무도 길고 긴 시간일 수 있겠지요. 10분은 참으로 오묘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분 단위로서의 10분 말고, 십분이라는 단어가 일상 대화에 쓰이는 경우를 본 적 있으신가요? 진짜 10분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10분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혼란스러웠던 경험 없으신가요?


겉으로 드러나는 단어의 의미와 그 단어가 지니는 실제적 의미 간에 차이가 있을 경우 단어 이해에 크고 작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 예로 이 ‘십분(十分)’을 들 수 있겠습니다.      


● 십분(十分): 아주 충분히

   [예]  너의 처지를 십분 이해한다.                    


십분은 한자도 십분(十分)이므로 시간의 분 단위로 10분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 단어의 실제 의미는 바로 ‘넉넉히, 충분히’라는 뜻입니다. ‘열 십(十)’과 ‘나눌 분(分)’으로 이루어진 이 단어는 10할, 곧 100%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충분히’라는 의미가 생겨납니다.  

또한 십분이 있다면 백분(百分)도 있습니다. 이 역시 시간의 단위로서의 100분이 아니라 십분을 과장하여 쓰는 말로 ‘충성심을 백분 활용하다’와 같이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분은 유의어인 ‘충분히’ 등과 완전히 대체되지는 않습니다. 결합되는 말과의 관계가 한정적이거든요. 예컨대


십분 먹다(?)

십분 자다(?)

십분 뛰다(?)    

 

와 같이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로 ‘이해하다’, ‘감안하다’, ‘발휘하다’와 같은 동사와 함께 활용되면서 상대방이나 상황에 대한 말하는 이의 정중한 진심을 표현할 때 쓰이는 특별한 부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단어를 굳이 써야 하나요?

그렇다면 ‘넉넉히, 충분히’와 같이 더 자주 쓰이는 쉬운 표현을 두고 왜 굳이 ‘십분’과 같은 단어를 써야 하는지 불만스러운 생각이 들 수도 있겠어요. 최근에는 ‘말은 쉽게 하고 글은 쉽게 써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이러한 생각을 더욱 부추길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양한 단어를 골라 써야 하는 이유에 대해 두 가지만 얘기하고 싶습니다.


먼저 단어 표현의 다양성과 내용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이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어요. ‘너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너의 상황을 십분 이해해.’라고 표현할 때 우러나는 화자의 감정이 있답니다. ‘십분’이라는 단어가 주는 힘이지요. (정확한 의미 전달은 덤이고요.) 일부러 어려운 말을 골라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을 가장 정확하고 진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단어를 골라 쓸 권리와 능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이유는 어휘력과 문해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 곧 단어의 다양한 활용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에는 이해(수용) 어휘(receptive vocabulary)와 표현(사용) 어휘(expressive vocabulary)가 있습니다. 이해 어휘는 말 그대로 화자가 그 뜻을 알고 있는 어휘이고, 표현 어휘는 화자가 직접 꺼내어 말하거나 쓰는 어휘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영유아 시기 다양한 언어적 자극을 제공하는 타인(주로 보호자)을 통해 어휘가 이해 어휘로 먼저 받아들여진 후 반복적인 언어 경험과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표현 어휘로 발전합니다.                        


  자기가 직접 쓰지는 못해도 그 의미나 용법을 알고 있는 어휘를 이해 어휘라고 하고, 수동적 어휘, 획득 어휘라고도 말한다. 말하거나 글을 지을 적에 사용이 가능한 어휘를 사용 어휘라고 하며 능동적 어휘, 발표 어휘라고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용 어휘의 양은 이해 어휘의 3분의 1 정도가 아닐까 하고 추정되고 있다.

(출처: 김광해(2004: 57), 국어 어휘론 개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의 양은 이해하고 있는 어휘의 양의 30% 수준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꺼내 쓰진 않습니다. 알고 있는 다양한 어휘들이 있어도 직관적으로 쓰일 수 있는 단어들만 꺼내어 쓰죠.. 대부분은 쉽고, 편하고, 단순한 일상 어휘가 중심이 됩니다. 알고 있는 단어 중 꺼내 쓰기 쉽고 빠른 단어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쓰지 않고 묻혀 있는 단어들은 한때 큰 기쁨으로 차려졌으나 결국 게으른 집주인의 냉장고에서 꽝꽝 얼려진 채 세월을 보내는 개업떡의 운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어휘력과 문해력 신장의 관건에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이해 어휘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풍부하게 표현 어휘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거죠. ‘십분’과 ‘충분히’를 모두 배운 화자의 머릿속에는 이 두 단어 모두 이해 어휘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의미를 표현할 상황에서 매번 ‘충분히’만 꺼내어 쓰고 십분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꺼내어 쓴 적이 없다면 십분은 그저 이해 어휘로 머물 뿐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채 이해 어휘로만 평생을 머물게 되는 단어의 운명은 너무나 비극적이지 않을까요? 표현되지 않는 어휘는 죽은 어휘입니다.     



<문해력이 쑥쑥, 한 줄 요약>

십분(十分)100%를 의미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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