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맙시다.
25년 11월 10일 오후 10시 30분
날씨가 금세 쌀쌀해졌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목이 칼칼했다. 따뜻한 물 한 두 모금이면 금세 괜찮아지는가 싶었다. 같은 회사 후임들이 한두 명씩 독감에 걸렸다며 마스크를 쓰고 올 때 면, 내심 어머니의 예방접종 맞으라던 잔소리를 떠올리다 금방 잊었다. 아들자식 키워봤자 아무 쓸모없다고 했던가. 하늘이 벌하듯, 불효자식에게도 독감이 금세 찾아왔다.
오랜만에 감기에 걸렸다. 코로나를 잊게 되면서, 마스크를 소홀히 했더니 금세 찾아온 독감. 그럭저럭 관리를 잘하면 금방 나을 정도라고 얕봤는데, 얼마 안 가 증상이 악화되었다. 마침 오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마스크를 쓴 탓에 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는데, 머리는 어지럽고, 열이 나서 온몸이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아팠다. 콧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친구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면, 얼른 때려치우고 집에 가라고 했을 것이다. 올해가 채 2달도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 연차만 12일 남아있는 나에게 이 정도 반차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내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회의준비를 끝내고 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통증들을 무시했다. 나와 같은 증상을 호소하는 후임이 오후에 반차를 쓰겠다고 했다. 그러라고 했다. 괜찮다. 서로의 빈자리를 메꾸는 게 팀워크 아니겠나. 다음에 아플 때 후임님이 나의 빈자리를 채워주면 된다. 아.. 근데 나도 지금 아픈데?
그렇게 회의는 그럭저럭 잘 마무리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소장님은 나에게 얘기했다. “왜, 너도 아프냐? 집에 갈 거냐?” 아픈 티좀 내지 말라는 말이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아픈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저 오늘 하루 업무를 잘할 수 있는지. 도중에 집에 가거나 해서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는지. 그 딜레이 된 업무를 본인이 하게 되진 않을지. 그런 것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나는 다 나아간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장님이 웃으면서 얘기헀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군.”
회사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고 돌보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뛰어나가서 약 사다 주고, 핫팩 구해다 주고, 바래다주고 했던 나 스스로를 비웃고 싶어졌다. 이마저도 회사와 스스로를 멀어지게 하는 방향들 중 하나였을까. 그저 각자가 할 일을 하면 되는 회사에서,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사실 그네들 각자의 사정인 거고,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아무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 회사에는 자주 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병은 만성적이고 유달리 심한지라, 병이 도졌다 하면, 그날 하루는 거의 죽은 사람 마냥 기어 다니며 지낸다. 입술은 시퍼렇게 질려버리고, 얼굴은 창백해져서 당장이라도 구급차를 태워주고 싶어질 정도다. 그렇게 아픈 그 사람도 중요한 마감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출근해서 본인의 업무를 다 끝내고 퇴근을 한다. 우습게도, 힘들어 죽을 것 같고, 다 때려치우고 싶고, 무너질 것 같은 와중에도 그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런 회사사람들의 행동을 보며, 그 사람을 걱정하고 보살피려고 했던 시간들이 아무 쓸모가 없었음을 되뇌었다. 나도 그처럼 하면 될 일이었다.
평소에는 아프면 아프다고 여기저기 티를 내고 다녔다. 물론 업무적으로 피해를 끼친 적은 없지만, 스스로 좀 어른스러워 보이는 게 이런 걸까 하고 이번에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그저, 너도 아팠냐?라는 식의 약간의 관심뿐. 아프다고 말해봤자, 내 몸이 낫는 것도 아니고, 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아프고 힘든, 벅찬 와중에도 어떻게 해서든 일을 마무리하려는 것. 아프고 힘든 그 상태에 스스로에게 연민을 쌓느라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것. 나는 이번 독감을 이겨내며 뒤늦게나마 배웠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순간, 정말 웃기게도, 허지웅 작가의 에세이에서 언젠가 읽었던 에세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고 버텨, 남 보기엔 엉망진창이 되더라도,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사람은 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