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의 참아왔던 그리움이 터지던 날
목요일 저녁,엄마에게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소고기에 전복, 메추리알을 넣은 장조림과
오이를 간단히 썰어 부추와 함께 버무린
오이깍두기를 만들었다며
우리집에 반찬을 주러 오신다고.
몇 달 전 이사한 우리 집은 교통이 더 불편해지고,
아파트 단지가 미로처럼 더 구불구불해서
엄마가 찾아오기 힘든 구조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집에 오려면
집에서 맞이할 누군가가
꼭 있어야하는 상황.
비밀번호를 알려드린다고도 해봤지만
새로운 출입 방식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며
자신없어하셨다.
우리는 둘 다 맞벌이라
집에 가장 빨리 오는 1학년짜리 막내에게
외할머니를 부탁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다음날 출근해서
내가 반차를 내고
집에 좀 더 일찍 오면 되겠지.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하지만 막내는 그날따라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저녁 7시부터 일찌감치 잠에 들어있어서
외할머니가 오신다는 이야기는
다음날 아침에 해야했다.
내일 애들 학교 가기 전에
집에 외할머니 오시기로 하셨으니까
막내한테 돌봄센터 가지말고 바로 집으로 가라고.
그리고 다음날, 금요일.
회사 점심시간에 식당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당신 혹시 막내한테 아침에
오늘 외할머니 오신다고 이야기했어?"
"헉! 깜빡했네. 나 오늘 좀 늦게 일어나서
애들 아침 챙겨주고 출근 준비만 얼른 하고 나오느라
그냥 나와버렸네;;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방금 전에 돌봄센터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
글쎄, 막내가 이랬다는거야.
선생님이 돌봄센터 문 앞에 서있었는데
막내가 돌봄센터 쪽으로 뛰어오면서,
'선생님 저 오늘 집에 할머니 오셔서
할머니 만나러 가야돼요~돌봄센터 못가요~'
하고 크게 외치고는 막~ 저 멀리
집 쪽으로 뛰어가더라는거야."
이상했다. 난 오전에 막내에게 그런 이야길 한 적이 없는데.
어제 막내는 분명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우리가 어제 말도 안해줬는데 할머니 만나러 간다고 그랬다고?
그리고 돌봄센터 선생님이 자기 안오면 걱정할까봐
선생님한테 그것도 따로 말해주러 들르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는 더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카톡으로 사진 보냈거든?
전화 끊고 이따가 그것도 한 번 봐봐.
글쎄 막내가 그러고 집에 가서는
할머니가 우리집 더러워보일까봐
아침 먹은 그릇도
싱크대에 넣어놓고,
장난감도 치우고 그랬대"
남편이 보낸 사진을 봤다.
에이닷으로 자동 저장되어있던 통화기록이었다.
감동을 넘어서서
막내 참 잘 크고 있구나 하는
기쁜 웃음이 터져나왔다.
거기에 더 빵 터진 건 마지막에 들은 막내의 말 한마였다.
"그리고 당신, 얼른 엄마한테 전화해서
어디까지 오셨는지 물어봐.
내가 막내한테 할머니가 주차장에서 초인종 누르면
집에 있다가 잠금해제만 풀어드리라고 했는데
막내가 그러지 말래.
당신이 할머니한테 전화해보고,
할머니 도착하기 몇 분 전에 미리
다시 자기한테 전화 달라는거야."
"왜?"
"당신이 시간 알려주면
주차장에 미리
할머니 받으러 내려가겠다고
ㅎㅎㅎ"
"할머니 받으러?ㅋㅋㅋㅋ"
나는 엄마에게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안그래도 엄마는 주차장에 막 도착했다.
막내가 마중나올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하고 놀라는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저기서 막내가 나오고 있어!
나 택시 내린 곳은 어떻게 알았지?
난생아. 나 들어갈게!"
엄마는 그렇게 깔깔깔 웃으며
막내의 에스코드를 받으며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치 어린이집 차에서 내리는 아이를 받으러 나온 아빠처럼
막내는 그렇게 든든했다.
퇴근 해서 아이에게 물어봤다.
"막내야. 너 오늘 할머니 오시는거 어떻게 알았어?"
"나 어제 다 들었어! 꿈속에서!
꿈속에서 할머니가 오신다고 하더라?
꿈은 꿈인데 뭔가 진짜 같았어.
그래서 바로 믿고 한거야~"
"그냥 꿈이기만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동안 외할머니 진짜 보고싶었구나 우리 막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진짠지 아닌지 가릴틈도 없이 너무 보고싶었나봐
진짜라서 천만 다행이네. 그런데 집은 왜 치운거야?"
"할머니가 우리집 와서 더러운거 보면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집안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할머니 오기 전에 얼른 다 치워놨지~
식탁도 닦고~ 스피너도 올려두고~
싱크대에 그릇도 넣었어!"
그 예쁜 행동 덕분에
엄마는 정말 집에서 할 일이 없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우리 집에만 오면
집안일을 찾아서 하던 엄마를
나도 알고 우리 아이들도 너무 잘 알았던 것이다.
한가해진 할머니는 막내 손을 잡고 놀이터에 나갔다.
막내는 형아와 함께 놀이터에서
1시간이나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다.
나는 엄마가 힘들까봐 걱정했지만
엄마 표정이 정말 밝았다.
"난생아. 너 애 참 잘 키운다.
애들이 둘 다 참 밝아.
글쎄, 첫째가 놀이터에서 뭐라는 줄 아니?
'재는 뭘 먹고 저렇게 컸대~'하고 어떤 엄마가 칭찬을 하니까
첫째가 '뭘 먹긴요~엄마 사랑 먹고 큰거죠~' 해버리더라니까?
그러니까 주변 엄마들이 아주 눈이 똥~그래져서는
쟤 말하는 거 들었어? 하면서 놀라더라."
한참 동안이나 엄마와 나는
우리 애들 둘다 잘 크고 있다는 단서를 나누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서며 엄마가 말했다.
"너희집은 어쩜 이렇게 밝니.
너 이렇게 잘 되고, 애들 밝은 모습 보니
엄마가 참 안심이 된다.
너 어릴 땐 참 힘들었을텐데.
엄마가 교회가면 집사님들이 다 그렇게
너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렸어.
이제보니 아주 나쁜 엄마였지."
"엄마. 괜찮아. 엄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잖아.
몰라서 못 해주고, 엄마도 힘들어서 그랬던거잖아. 엄마도 사람이니까.
중요한 건, 그래도 잘 살아보고 싶었던 거잖아.
가정을 지키고 싶었던 게 엄마 진심이잖아. 그리고 지켰고.
엄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어. 나는 그것만 마음에 남겨뒀어.
나도 우리 애들한테 잘못하거나 실수할 때도 많을텐데.
우리 애들도 나 생각할 때 그래도 엄마는 우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고 기억해주면 좋겠어"
맞벌이로 낮 동안 텅 비고 허전했던 우리 집에
엄마가 찾아와 주어서, 따스한 온기가 가득했다.
아이들이 더 밝아보였던 건 아마도
보고싶던 외할머니를 만나서였을 것이다.
매일같이 정리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해도
달라지지 않던 아이가
할머니가 온다는 말 한 마디에
참아왔던 그리움을 행동으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