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말레이시아] 양국의 역사적 순간들: Part1

by 나누리

한국에서 약 4,700km 떨어진 곳,

말레이시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공식 수교를 맺은 것은 1960년,

벌써 65년 전의 일입니다.

그리고 수교 64년 만인 작년,

양국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죠.


올해 양국 수교 65주년을 맞아,

저는 오늘 여러분께 잘 알려지지 않은

양국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페낭, 말레이시아

그 첫 번째 페이지는

1855년, 말레이시아 페낭에 위치한

‘컬리지 제너럴’에서 시작합니다.


컬리지 제너럴의 초기 모습


컬리지 제너럴의 역사는 16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파리외방선교회가

아시아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태국 아유타야에 세운 신학교에서 시작되었죠.

이후 태국-버마 전쟁과 종교 박해로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던 신학교는

마침내 1809년,

현재의 말레이시아 페낭 풀라우 티쿠스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이야기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모하메드 잠루니 빈 카리드,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


“기록을 통해 우리는 19세기 후반,

한국 신학생들이

페낭 컬리지 제너럴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19세기 후반,

당시 말라야(현재의 말레이시아)에서

공부한 한국인 신학생이

21명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당시 외국으로의 여행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수의 한국 유학생이

먼 길을 떠나 말라야로

유학을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모하메드 잠루니 빈 카리드,

주한 말레이시아 대사


오랜 기간 페낭으로 유학을 떠난

한국인 유학생들을 연구해 온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당시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기에,

신자들은 산 속에 숨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1836년, 선교를 위해

한국에 들어온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다니며 훌륭한 소년들을 선발해

서당같은 작은 신학교를 만들어

한문과 라틴어를 가르쳤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철학과 신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는 어려워

이들을 유학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페낭의 컬리지 제너럴은

아시아 지역 신학생을

교육시켜 사제로 양성하는

종합 신학 기관이었습니다.

그렇게 1855년, 처음 세 분이 유학을 떠났고,

그 후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순차적으로 21분이 유학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페낭에 유학 간 신학생은

총 24명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페낭 신학교 교수 우도(Oudot) 신부와 조선인 신학생들, 페낭 1886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이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세기 중후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여행 과정은 어땠을까요?

저는 페낭으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그 때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김성학 알레시오의 "빗랑유학회고기"가 실린 34년 「가톨릭 청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 우리나라에는 흰 눈이 펄펄 내리고 개울물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인데,

여기는 한참 복더위가 불타듯이 날씨가 몹시 더웠다.

다른 승객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여름 옷을 입고도

더위에 부대끼며

땀방울을 떨어뜨리고 앉아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솜바지 저고리처럼

퉁퉁한 겨울 복장을 그대로 입고 있지 않은가.

등은 모닥불을 짊어진 듯이 후끈거렸고,

온 몸에서는 땀이 샘솟는 듯했다. (…)

그런데 나이를 더 먹은 강 서방은 언제 그랬는지

바지와 저고리를 뜯어 솜을 빼고

속거죽도 제거한 뒤

홑겹만 입고 나와서

“애들아, 이것 봐라, 참 시원하다” 하며

득의만면한 얼굴로 같이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조금 후, 강 서방은 또

“애들아, 저것 좀 봐라” 하며 창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무정히 잘린 상투 하나가

이국의 검푸른 바다 위를

외롭게 떠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강 서방의 머리를 보고,

그 출처를 알 수 있었다. (…)”


「가톨릭 청년」1934년 1월호에 실린

김성학 알레시오의 “빗랑유학회고기” 중 일부

배를 타고 페낭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후 페낭에 도착한 이들은

매우 진지한 자세로 유학 생활에 임했죠.


"여러 나라 사람이 모인 만큼

자기 나라 말을 쓰지 말고

모두 라틴어를 사용하라는

학교 규칙이 있었으므로

처음 들어간 우리에게는

얼마 동안 여간 곤란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귀를 열리게 하고

혀를 풀리게 해야겠다는 각오로 힘써 연구한 결과,

두서너 달 후에는

넉넉히 라틴어로 하고 싶은 말이 다 통하게 되었다.

라틴어 뿐만 아니라 다른 학과에 있어서도

우리는 '조선의 명예를 위하여'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은근히 분투하여 좋은 성적을 얻었다."


「가톨릭 청년」 1934년 6월호에 실린

김성학 알레시오의 “빗랑유학회고기” 중 일부


페낭에서 학문과 신학을 배우고

돌아와 신부가 된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한국 가톨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일부는 조선인 주도로 세운

최초의 신학교 설립에도 참여했죠.


페낭 컬리지 제너럴의 과거 모습


현재 컬리지 제너럴은 플라우 티쿠스에서

약 3km 떨어진 탄중 붕아로 옮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 위치한 페낭교구박물관에는

170여 년 전 이곳에서 공부했던

한국인들에 대한 기록이 여전히 남아있죠.


라틴어로 작성된 당시의 생활 기록부, 분홍색 형광펜으로 표시된 부분이 김성학 알레시오의 기록이다.


위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당시 생활기록부에 신앙심, 태도,

근면과 성실성, 교리 교육 등

21개 항목에 걸친 세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김성학 알레시오는

암기와 낭송 부문에서 ‘매우 우수함’이라는

평가를 받았죠.


“페낭에는 당시 우리가 보냈던

신학생들의 생활기록부와 성적표 등이

아직 남아 있어요.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자료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저희가 작년에 그 곳을 한 번 방문해

자료 보존 처리를 해 두고 왔습니다.

그곳에 남아 있는 기록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유학사 전체 흐름을 볼 때,

초기 단계의 중요한 기록으로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죠.”


-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 이사


20세기 초 페낭의 모습

19세기 후반 페낭으로 떠났던 24명의 신학생들…

그들이 남긴 기록과 사진,

그리고 일상의 작은 흔적들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과 말레이시아,

두 나라가 맺은 첫 인연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심어 놓은 작은 씨앗은

세월을 건너, 오늘의 큰 열매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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