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피로사회>,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정수남을 읽고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는문장으로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시작한다.
지난 세기가 박테리아, 바이러스,타자, 적 등 부정성을 띄는 이질성에 대한 공격과 방어,그리고 제거를 위한 노력이 지배하던 면역학적 시대였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이질성과 타자성의 소멸을 두드러지는 특징으로하는, 즉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의 시대이다.
세계화와 미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허물어진 경계와 장벽들로 인한 혼성화 경향,그로인해 배척할 것을 상실한 시대에의 ‘같은 것의 과다’는과잉 생산, 과잉 가동, 과잉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진다.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반발은 ‘면역 저항이 아니라 소화 신경적 해소내지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고,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등은 신경성폭력 현상을 낳는다.(한병철. P.18~19)
이러한 패러다임의 가장 주요한 원인은 21세기가 규율 사회에서 성과 사회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 사회의주민도 더 이상 ‘복종적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라고 불린다.”(한병철, p.23) ‘~해서는 안된다’는 금지의 부정성으로 규정되던 규율사회에서, 점점 강제성에서 벗어난 무한정한 ‘할수 있음’이 긍정적 조동사로 작용하는 성과 사회로 이동한다. “’예스 위 캔'이라는 복수형 긍정이 이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드러내[듯,]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한병철, p.24)
이러한 긍정성은 부정성만큼이나 폭력성의 띄게된다.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는 알랭 에랭베르 Alain Ehrenberg에 따르면, 우울증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인간에게 사회계급과 성별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한병철, p.26)
명령과 금지가 자기 책임과 자기 주도로 대체될때, 성과를 향한 압박과 자신을 만들어 내야한다는 압박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 인간은 자발적으로 과다한노동과 성과로 자신을 착취하고, 마치 모두 저마다의 노동수용소를 달고 다니면서,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들처럼 “나치 강제수용소의 무젤만[1]과 유사한 증상을 나타낸다.” (한병철, p.44)
인간은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질 수 밖에없다.
이는 2000년대이후 한국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글에서 정수남이 규정하는 공포의 사사화 개념과도 맞닿아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무한경쟁과 불안한 미래는 “국가의 개입을 받지 않는 유연한 시장 상황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고 그게 상응하는 보수를 각자 알아서 취하라는 ‘신자유주의적’ 자유에서도래한다.”(정수남, p.345) 국가는 사회경제적 책임을 최소화 하고, 개인이 스스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는 개인들에게
'네 인생 앞에 놓여있는 불안과 위험을 스스로 자유롭게 해결하라'고 외친다
신자유주의는개인들에게 “’네 인생 앞에 놓여있는 불안과 위험을 스스로 자유롭게 해결하라’는 구호를 외”(정수남,p.339)치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하강이동의 두려움을 안고 있는”(p.341) 한국의 개인들은 자기 계발, 자기 관리, 자기거버넌스(governance)에 몰두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누구나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평등주의적 에토스’에 기반하고 있지만, “남들과 똑같을 경우 그 누구도 부자가 될 수없다는 경쟁의 덫”을 빠져나와야 하기에, 예속의 제약과 불신과 공포의 버거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여러 심리 장애는 나르시시즘과연결될 수 밖에 없다.
세네트에 따르면, “기대가 끝없이 올라감에 따라 사람들은 그 어떤 행동에서도 결코 만족감을 맛 볼수 없게 되는데, 이와 나란히 무언가를완결시킬 수 있는 능력도 상실된다. 어떤 목표를 이룩했다는 느낌은 회피된다. 왜냐하면 완성을 통해 자신의 체험은 객관화 되고 하나의 형태, 형식을얻게 될 것이며 이로써 자아에서 독립한 안정적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자아의 계속성, 자아의 운동이 완결되어 있지 않고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르시시즘의 본질적 특징이다.”(한병철, p.89)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생산해내려는 노력은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점점 얇게 하고, 완결된 형태를 향한 객관적인 결단력을 상실하게 한다.
또한 과잉 사회에서의 전반적인 산만함과 그로인해 상실된, 오래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사색적인 능력으로 인해 비판이나 “돌이켜 생각하기가 불가능”해 지고, “사유는 무한한 대상들 속으로 흩어”져 버린다.(한병철, p.53) 따라서“강렬하고 정력적인 분노가 일어날 여지를 없애”버리는데,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 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수 있는 능력”이다.(한병철, p.50)
스테판 에셀에 따르면 “이 사회는 더 이상 개개인의 노력에응분의 보답을 해주지 않”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신뢰하지도 않는 체계속에 어느새 편입되어버렸”다. (에셀, p.59)
그는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며 정의롭지 못한 일이 자행되는 곳에 압박을 가하는 것이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p.55)
하지만 이미 탈진해 버린 개인들에게, 가상 공간에서의 자신의 포장된 표현과 그로 인한 정체성 형성이 유일한 안정을 주고 있는 나르시시즘적 자아에게, 자기 밖의 어떤 것에 대해 분노할 능력은 남아있지 않다.
[1] 무젤만은 탈진하여 완전히무력해진 수감자들로서, 극심한 우울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감각 상태에 빠져 심지어 육체적인 추위와감독관의 명령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한병철,p.44)
[참고 문헌]
한병철 <피로사회>
스테판 에셀 <분노하라>
정수남 '공포, 개인화 그리고 축소된 추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