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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주 Jun 27. 2021

옥장판 50장

[글모사 9기] 주제 1: 엄마의 말

혜정은 등교 준비를 하는 막내아들 옆에 슬며시 다가간다. 어둔 그늘 가득한 효성의 표정에 덜컥 겁이난다. 효성이 망설이며 입을 연다.

"엄마, 있잖아...."

"응, 우리 막내아들. 얼굴이 어둡네. 무슨 일 있어?"

"실은.. 어젯밤에 자려고 누웠는데 형이 좀 이상한 소리를 했어요."

"형이?"

"네.. 엊그제 친구한테 연락이 왔는데 되게 좋은 분을 만났다면서 같이 만나러 가자고 했대요."

"아, 그랬어? 친구 누구?"

"현민이 형이요."

"현민이? 걔가 누구야?"

"형이랑 동창인데 얼마 전부터 친해졌대요. 근데 지방에서 대학 다니다가 작년 가을에 대단한 분 만났다면서 학교를 그만뒀대요."

"학교를? 저런... 그래서?"

"어제 형도 현민이 형이랑 같이 그분을 만나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랬구나. 그래서 또 뭐라고 하든?"

"아.. 이걸 말해도 되나... 형이 아직 엄마한테 말하지 말랬는데..."

"고민될 만한 이야기를 했나 보구나.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까?"

"아냐, 엄마. 지금 이야기할게요. 시간 두고 볼 일은 아닌 거 같아요."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


"정말 큰 일이구나. 형이 덜컥 사업을 시작해놓고 너한테 응원을 받고 싶었던 모양인데..."

"네, 근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요...''

"네가 맘고생 많았겠다. 일단 우리 둘이 알고 있자. 아빠 아시면 또 쓰러지실라. 엄마가 외삼촌에게 상의해볼게."

"네, 엄마. 걱정도 되고 형도 안스럽고 그래요. 저라도 그런 이야기 들으면 혹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엄마한테 먼저 말해줘서 고맙구나. 우리 효성이, 형 걱정돼서 푹 못 잤겠네."

"거의 밤을 새웠죠. 이걸 어쩌나 어떡하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하면서요..."

"그랬구나. 등교시간이니까 일단 학교 다녀오자.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엄마한테 맡겨."

"네, 고마워요. 엄마."


준비를 마친 효성이 엄마를 안아주고 문을 나서자 혜정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아들을 보낸다.


철컥, 문이 닫히고 현관 천장에 있는 주황 불이 탁하며 꺼진다. 혜정은 주저앉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렇게 된 건 누구의 탓일까. 어떻게 하며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거지? 뜨거운 액체가 얼굴에 흘러 다니는 것 같다. 손으로 만져보니 눈물이 범벅이다. 안방에서 곤히 잠든 남편을 혹시 깨우게 될까 두려웠던가. 하염없는 슬픔과 괴로움이 소리없이 눈에서 흘러내렸다.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 혜정은 남식을 부드럽게 불러 깨워본다.

"여보~ 여보~"

"으으.. 으..."

"이제 아침 먹을 시간이에요. 체조도 하고요."

"으.. 응. 일어날게."

"밥 가지고 올게요.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응. 해볼게. 고마워, 여보."

"네. 잠시만요."


혜정은 사고 후 몸이 많이 쇠약해진 남편을 위해 소화가 잘 되는 죽과 간단한 반찬을 준비한 상을 들여온다. 겨우 일어난 남식이 죽을 보고 인상을 쓴다.

"왜요, 입맛이 없어요?"

"아니. 그냥."

"소화가 잘 되는 걸로 준비했는데 맘에 안 들어요?"

"아냐. 됐어. 그냥 먹을게."

"고마워요, 여보"

남식은 몇 숟갈 뜨다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오늘은 청양고추 몇 개 넣었어? 영 맛이 안 느껴져."

"아, 청양고추가 2개밖에 안 남았는지 모르고 어제 장 볼 때 못 샀어요. 미안해요."

"입맛이 없으니까 기분이 안 좋아. 먹는 재미도 없고, 집에만 있으니 힘드네."

"그랬구나. 미안해요. 오늘 꼭 청양고추 사 올게요."

"그래요. 고마워. 요즘엔 뭘 먹어도 입이 덜덜한 게 이상해."


혜정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밥상을 들고 주방으로 나온다. 남편은 원래 저렇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 일도 잘하고, 양가 어른도 잘 챙기는 멋진 서방님이었다. 그러나 4년 전 뺑소니 사고 이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혼자 일어나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마치 아기처럼 되어 맨날 입맛 없다고 투정이나 부리는 남편에게 맏아들이 벌인 일에 대해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이다. 일단 바로 밑에 남동생, 진성이 외삼촌에게 전화를 하고 함께 상의해 봐야겠다.


"여보, 자요?"

"아니, 아직."

"나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어디가? 나 혼자 있기 싫어."

"청양고추 사 와야죠. 잠시만 있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청양고추? 알았어. 얼른 와."

"네. 잠시만 있어요.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지금은 없네."

"네, 알겠어요."


지갑과 장바구니를 챙겨 얼른 집에서 나온 혜정은 서둘러 동생 정호에게 전화를 건다. 막내 효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고 진성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좀 들어보라고 부탁했다. 통화가 끝나자 부리나케 마트로 뛰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10분이 넘으면 갓난아이처럼 점점 약해져 가는 남편이 역정을 내기 때문이다.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여보세요, 외삼촌? 안녕하세요."

"그래, 진성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니?"

"네, 덕분에요. 외삼촌은요? 외숙모랑 가족분들 모두 건강하시지요?"

"그래. 우리도 잘 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서."

"독서실 알바랑 편의점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시작한 지 얼마쯤 되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시작해서 지금 2년 좀 넘었어요."

"오랫동안 고생했네. 밤, 새벽 타임으로 주로 했지?"

"네. 낮에는 자격증 좀 따려고 공부하느라고요."

"그래그래. 수고 많이 했다. 우리 진성이 장하네."

"감사해요, 외삼촌. 늘 살펴주셔서요."

"진성아, 지금 어디니?"

"지금 친구랑 잠깐 어디와 있어요."

"아, 그래. 혹시 너 시간 좀 되니?"

"무슨 할 이야기 있으셔요? 지금 알바 가야 해서 오늘은 힘들 것 같고요. 내일 오전에는 괜찮아요."

"그래. 외삼촌도 내일 오전에 좋다. 내일 외삼촌이 집 앞으로 갈게."

"네, 그럼 내일 봬요."

"그래, 내일 보자."


뚜루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루

"누님."

"어, 동생. 진성이랑 잘 만나봤어?"

"네, 방금 헤어지고 바로 전화드렸어요."

"진성이가 이야기 하든?"

"아니요, 전혀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하더라고요."

"그랬구나. 효성이한테도 말하지 말랬다 하더라고. 그래도 너한테는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너무 섣불리 물어보고 하지 말하고 하는 것보다 좀 두고 보자 싶어서 근황 이야기나 하다가 헤어졌어요."

"그랬구나. 동생, 우리 진성이 챙겨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자형은 좀 어떠세요? 어제 진성이 이야기 듣고 놀라서 이제야 여쭙네요."

"크게 차도 없다 하더라고.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고 있대."

"그렇군요. 걱정이네요. 진성이가 자형 그렇게 되고 나서 자기가 집안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에 그런 일에 빠져든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짠했어요."

"나도 그런 마음 들어서 막 대놓고 묻지를 못하겠더라고. 이따 들어오면 내가 말해봐야겠다."

"그래요, 누님이 한 번 말씀해보셔요. 진성이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너무 몰아붙이진 마시고요."

"그럴게. 고마워, 동생. 바쁠 텐데 어서 들어가."

"네, 누님. 끊습니다."

"어."


딩동

초인종 소리에 후다닥 혜정이 현관으로 달려 나간다.

"누구세요?"

"택배입니다."

"택배 시킨 적 없는데요?"

"이진성 씨 댁 아닌가요?"

"맞는데... 택배 온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요."


그때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그거 제 거 맞아요. 아저씨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진성아, 이게 다 뭐야?"

"응, 엄마 나 이제 사업하려고."

"사업? 무슨 사업을?"

"응. 현민이 알지? 현민이가 소개해 준 건데, 옥장판으로 그 녀석이 한 달에 2천만 원씩 벌고 있대잖아."

"옥장판으로 2천만 원을?"

"네~! 엊그제 만났는데 BMW를 끌고 온 거 있지?"

"엄청 잘 나가나 보네."

"그렇대요. 현민이네 사업장에도 가봤는데 진짜 멋지더라고요. 엄마도 언제 한 번 같이 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그런데 이 옥장판들이 대체 몇 개나 되는 거야?"

"응, 오늘 가지고 온 건 1인용 20장, 2인용 30장이에요. 요새 이게 그렇게 인기래."

"그렇구나. 경기가 안 좋은데도 잘 팔리나 보네?"

"엄마, 아빠 주무시니까 이제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진성의 이야기는 이랬다. 현민이 소개해준 사람은 현민의 이모부라는 사람으로 현재 월 매출 1억을 달성하고 있는 김 사장이라는 남자였다. 현민은 진성을 김 사장의 사무실에 데려가서 강의를 듣게 했다. 처음에는 옥장판을 직접 팔지만 나중에는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여 옥장판을 팔게 하면 돈을 더 쉽게 빨리 벌 수 있는 사업 시스템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현민은 자신의 사업장에 초청하여 얼마나 번창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아주 예쁘고 잘 차려입은 여성이 4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현민에게 강 사장님, 강 사장님 하면서 잘 따랐고, 무척 친절했다.


2년 간 독서실과 편의점에서 자신의 시간을 축내는 느낌으로 살아왔던 진성은, 병원비가 없어 아버지를 집에서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다 합쳐야 150만 원 겨우 되는 한 달 아르바이트비는 아픈 아버지, 아버지를 모시는 엄마, 고등학생인 동생, 그리고 자신이 먹고살기에 빠듯했다. 아니 모자랐다.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잘 먹지도 못하는 동생에게 맛난 것도 먹여 주고, 학원에도 보내주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에게는 쉼을 주고 싶었다. 그런 진성에게 현민이 다가온 것이다.


진성이 물었다.

"현민아, 나, 이 사업해볼 수 있을까?"

"너 지금 가진 돈 좀 있어?"

"아.... 니.. 지금은 없지. 내가 번 돈으로 집안 식구들이 먹고 사니까."

"그렇구나. 괜찮아. 시작할 때 자금이 좀 있으면 더 좋지만 내가 네 친구니까 보증하고 시작하지 뭐."

"정말? 그렇게 해줄래? 열심히 할게."

"내가 너 잘 알고 믿으니까 소개한 거야. 김 사장님 말씀하신 우리 사업 시스템 대로만 하면 1개월에 천만 원 버는 건 시간문제야~!"

"아, 그래?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될까?"

"일단 옥장판부터 직접 팔아봐. 너 파는 거 보고 더 주던가 하지 뭐. 다들 금방금방 팔더라고. 그리고 못 팔면 그냥 네가 사면되고."

"내가 사?"

"응. 사 뒀다가 팔면 되니까."

"나중에 집에 뒀다가 파는 거네?"

"걱정 마. 금방 팔려. 이게 요즘 얼마나 인기 많다고. 서로 사려고 난리야, 난리."


혹시나 팔리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스치려는 찰나 가슴골이 다 보이는 화려한 분홍 정장을 입은 여성이 다가와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진성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신도 곧 현민처럼 멋진 사무실과 아름다운 직원으로 대동한 사장님이 될 거라 믿으며 꿈꾸기 시작했다.


"현민이가 그렇게 크게 되었다고? 이야, 대단하네."

"어, 엄마. 현민이 그 녀석 다른 건 몰라도 학교 다닐 때부터 참 착했잖아."

"아, 그랬어? 엄마는 잘 기억이 안 나네. 현민이네 부모님이 사이가 안 좋았던 것만 생각이 나서..."

"아, 그거? 예전에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그랬는데 지금 잘 지내신대요."

"잘 됐구나. 근데 너 현민이랑 친했었어?"

"고등학교 때는 별로 안 친했는데 얼마 전부터 연락하고 지냈어요."

"그랬구나. 졸업 후에 친해지기는 쉽지 않은데 신기하네."

"아르바이트하는 독서실 있잖아요? 그 근처에 현민이 사업장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자주 만나게 됐죠. 최근에."

"그랬어. 현민이랑 사업하게 돼서 좋으니?"

"네, 너무 기대돼요, 엄마! 이제 아버지도 병원에 모실 수 있고, 우리 효성이 학원에도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그래. 그럼 너무 좋겠네."

"엄마, 저 사업 시작하는 거 찬성하시는 거예요?"

"우리 진성이 이제 성인이잖아. 엄마한테 뭐할 건지 미리 상의해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진성이가 하는 일은 뭐든 엄마는 진성이 응원할게."

"고마워요, 엄마. 열심히 할게요."

"그래, 우리 진성이는 뭐든 잘할 거야. 진성아, 뭐든 하고 싶은 거 해보고 네가 책임도 질 수 있으면 엄마는 그걸로 만족한다. 사랑한다, 아들."


혜정의 눈가에 짙은 근심이 내린다.


(사진출처: Pixabay, by Pete Linf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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