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해 Nov 03. 2020

책 읽어주는 남자

서평인데 영화 리뷰 같은 느낌적 느낌

https://www.rogerebert.com/reviews/the-reader-2008


병약한 어린 10대 소년은 30대 중반의 한 여성을 우연히 만나면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소설의 첫 도입만 보면 10대의 성장소설 같다. 책 읽어주기, 사워, 사랑 행위 그리고 잠시 같이 누워있기. 부적절한 만남처럼 보이는 그 관계 속에서 혼동과 성장 사이를 오고 가는 한 소년. 그 소년이 묘사하는 여성, 한나의 모습은 독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전후의 독일, 전범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 문맹과 책, 개인의 선택과 자유 등 다양하고 깊이 있다. 이 무거운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으면서 동시에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게 만드는 작가가 놀랍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한 인간의 성장기인 동시에, 역사 속에서 전후의 세대 간의 갈등이기도 하고, 문맹이 문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해피앤딩은 아니다. 무거운 질문을 계속 던진다. 처음부터 그 질문을 던졌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자는 처음의 이 둘의 관계에 몰입해서 빠져든 상태라 그 질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나가 법정에서 그 질문을 대신한다.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녀가, 그리고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무겁다.


사랑

https://www.philosophytalk.org/blog/thoughts-reader

미카엘은 병약한 소년이었다. 그는 우연히 만나게 된 한나를 통해 훌쩍 자란다. 사람과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장한다. 그 근간에는 안정감이 있었다. 한나를 통해 미카엘은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안다는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었다. 그 자신감을 통해 학업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되고 선생님과 소녀들의 관심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사랑한 사람이 전범이거나 흉악범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을 사랑한 것은 유죄일까?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이룬 내 성장은 무의미한 걸까?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탓에 유죄였다."


사춘기 소년의 열띤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가 될 뻔했지만 한나는 그 둘 사이의 매개체로 책을 둔다. 한 사람은 책을 읽고 한 사람은 듣지만 책을 통해 두 사람은 함께 성장하고 주인공에게 공감하고, 생각을 넓혀간다. 한 사람은 글을 모르고 한 사람만이 글을 읽기에 가능한 관계다. 한나는 육체를 통해 미카엘을 이끌고, 미카엘은 글을 통해 한나를 이끈다. 이렇게 두 사람은 뫼비우스처럼 연결되어 있다.


두 사람은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는다. 책을 읽으며 책 속 주인공의 고난에 안타까워하고, 깨닫지 못함에 답답해하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가는 경험을 한다. 우리가 그들을 책으로 읽듯이 그들도 책 속에서 책을 읽는다. 궁금하다. 그렇게 책을 읽었음에도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왜 변하지 않는 걸까? 이 질문은 곧 이 책을 읽는 나를 향한 질문이 된다. 미카엘처럼 변명해본다.


"행동은 나름대로의 원천을 갖고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아니면 상상력이 작동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아서일까?


"상상력은 현실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보완하고 장식해준다. 당시 상상력은 거의 작동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비극을 직접 겪지 않은 우리는 달라야 하지 않나? 이런 간접 경험에도 한나는 왜 글을 배우지 않았던 걸까? 왜 자신이 문맹임을 인정하는 대신에 죄를 다 뒤집어쓰고 종신형에 처해질까? 이 답을 찾기 위해 주인공은 철학에 기댄다.


철학


결코 쉽지 않은 문제를 봉착했을 때 우리는 책 속에서, 역사에서, 종교에서, 철학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미카엘은 그 답을 철학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철학은 한계가 있다.


"나는 가끔 가족인 우리가 아버지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중략) 이 녀석들은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존재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먹이를 사러 가고 고양이의 변기를 치우고, 가축병원에 가는 것은 사실 너무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생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미키엘은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면 벌금형으로 끝날 텐데 모든 죄를 안고 종신형을 받으려는 한나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한다. 아버지는 개인의 자유와 품위에 대하여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을 객체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버지는 품위와 자유 관점에서 볼 때 어른들의 경우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론이 행복이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 상대방의 눈을 뜨도록 해주지만 최종 결정은 본인에게 맡겨두고, 직접 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주라고 한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아버지의 대답에 미카엘은 실망한다. 나치의 잔인함, 그 잔인함에 마비된 사람들의 행동에 철학은 답하지 못했다. 그 사람(히틀러)을 직접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택은 그 사람의 몫이라고 말해버리니까. 많은 유대인이 죽었다. 행위 주체로서의 사람에게 자유는 어디까지 줄 수 있는가? 당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미카엘이 만난 철학은 위험하고, 나약하고, 무기력하다.



전범들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며, 그들을 이해하거나 비난하거나, 고통을 느끼는 그 당시 세대에 속하는 미카엘은 그 죄인을 사랑한 자신에 대해 용서받고 싶고, 그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알고자 답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법에서도, 재판 과정에서도 그는 답을 찾지 못한다.


"살인과 죽음을 직접 목격했을 때 그런 수감자가 느꼈을 것과 똑같은 마비 상태에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든 기록은 이러한 마비 상태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다.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 무자비하게 되고, 가스 살포와 화장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법정에서 변호사들은 싸우고, 돌아가고, 다시 법정에 와서 싸운다. 그들에게 이건 그냥 일이다. 누군가를 감옥에 가두는 결정을 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도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해도 필요 없다. 그냥 일이다.


명령으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미움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죽인다. 명령의 복종의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 그냥 일을 하는 것이다.


한나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감시자로서의 역할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한다. 일이다. 교회에서 갇혀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던가,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그냥 마비 상태로 무감각하게 있게 된다.  


미카엘은 질문을 던진다.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들은 경악과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할 수 있는 전부인가?"


나 또한 질문이 생긴다.


"마비 상태에 빠져 타인에 대해 무관심, 무자비하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서


유죄 판결을 받을 정도로 자신이 문맹임을 드러내려 하지 않던 한나는 드디어 글을 배운다.


"한나는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왜 미리 배우지 않고 그렇게 뒤늦게 배우게 된 것일까? 더 미리 배웠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뒤늦은 후회와 용서를 구하는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 들이다. 아무도 용서할 수 없다.




작가가 읽어주는 이 책을 읽는 우리는 한나다. 우리는 무지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아직도 무지하다. 우리는 언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갈 수 있을까?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숨기고 핑계 대고 다른 일을 할 것인가?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른 채, 아니면 무지하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은 아닐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