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아주기
18개월 된 나영이는 태어날 때 몸무게 2.9 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적은 체중을 염려한 부모는 아이가 잘 안 먹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원인을 찾던 부모는 검색하다 설소대가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여 설소대 절제 수술을 받게 했다.
여전히 잘 안 먹던 나영이는 이유식도 거부하다 생후 9개월이 되면서 구역질과 구토를 시작했다. 병원을 가고 최고급 분유로 바꾸었지만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위 내시경을 했더니 위식도 역류증과 알레르기 위장관염이 의심된다고 했다. 처방으로 12주간 약물을 먹었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나영이의 증상은 병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입이 짧아서였다. "괜한 수술과 검사 및 투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p.111) 아이가 잘 자라지 못할 것 같은 부모의 불안감 때문에 두려움을 피하고자 아이에게 섭식을 강요하고 트라우마를 안겨줄 뻔 했다.
"소확혐은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 혹은 작지만 확실히 싫어하는 것을 의미한다(p.126)"
나쁜 기억들은 어떤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떠오른다. 말 그대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그 이유는 "두려움을 기억하는 뇌세포들은 맥락을 기억하는 세포들과 복잡하게 얽혀있"(p.60)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서웠는지 기억해야 그 상황이 되면 도망치거나 대응을 할 수 있다. 두려움은 맥락 속에 있다.
“맥락 회로만 자극해도 두려움 회로는 자동적으로 발화"(p.60) 하기도 한다. 불필요한 순간에도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특히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뇌의 기억 능력이 손상되는 반면, 나쁜 기억을 저장하는 편도체는 활성화된다. 뇌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나쁜 기억을 반복해서 겪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 행동이 '행동 편향 '과 '부작위 편향'으로 나타나고, 상황을 미리 '컨트롤'하려고 한다. 개입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다행이지만 개인, 조직, 더 나아가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된다. 손실을 피하려고 하는 인간의 두려움은 '나쁜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행동 편향은 "결과와 상관없이 가만있는 것보다 뭔가 행동"(p.97) 하는 것을 말한다. 부작위 편향은 "어떤 일을 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손해보다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므로써 발생하는 손해를 덜 나쁘다고 생각하는 경향"(p.102)을 말한다.
위에 예에서도 나영이가 안 먹는 것을 걱정한 부모님은 무엇이라도 하려는 행동 편향을 보였고, 그 상황에 개입하여 아이에게 수술, 검사, 투약을 했다. 그래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에게 나쁜 기억을 심어주게 될 뻔 했다.
문득 떠오르는 나쁜 기억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혐오를 보이거나, 남에게 책임 전가를 하기도 하며, 타인의 평가나 거절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도 하고, 집착, 강박, 편집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기억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억은 왜곡된다. "엘리자베스 로프터스가 말한 기억 오염은 당사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마저 바꾸는 현상을 말한다.(중략) 이렇게 되면 자신의 기억에 대한 확신이 얕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은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편향을 내세워 자신만의 나쁜 기억을 더욱 강화시킨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억의 오류와 망각이 더해진 인간은 현재의 관점에서 기억을 재구성하게 된다."(p.257)
문득 떠오르는 나쁜 기억은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
두려움의 시작점에서 내 안의 믿음을 찾는다.
문득 떠오르는 소확혐 기억은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이럴 때 긴장을 풀고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나를 곰곰 생각해보면 의외로 쉽게 두려움을 해결할 실마리가 풀릴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이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옥시토신이 편도체를 눌러 이길 수 있다.
"내 안의 어딘가에 있을 '믿음'을 찾아서 가져와야 한다." (p.298)
나를 완성시키는 '나쁜' 기억을 직면해보자.
"아픈 기억은 부딪혀봐야 한다. 회피하는 것은 또 다른 나쁜 기억의 왜곡을 가져다줄 뿐이다."(p.269) "이럴 때 피하지 말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에 따르는 감정을 이해하고 그 감정을 일으킨 기억과 마주쳐봐야 한다. 이것이 자각이다. (중략) 나쁜 기억이 아무리 아파도, 기억과 마주하는 것이 아무리 두려워도, 자신을 죽일 수도 없고 죽여서도 안된다. 죽일 정도가 아니라면 오히려 그런 경험들이 나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p.315)
<<나쁜 기억을 지워드립니다>>(기시미 이치로, 부키, 2020)에서는 철학자는 "지금이 바뀌면 과거의 기억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신의 기억이든 남의 기억이든 지우고 싶다는 건 그것이 '나쁜' 기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거 일을 제대로 마주한다면 이는 머지않아 '나쁜' 기억이 아니게" 된다. 고통으로부터 우리는 배우고 더 나아진다. 우리는 기억으로부터 삶의 다양한 교훈을 얻는다.
영화 <<다크 시티>>에서는 외계인이 인간의 모든 기억을 조작한다. 모든 외계인이 하나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고 어떤 이유에서인가 멸종해 가고 있다. 이들은 인간이 번성하는 이유를 각기 개인이 가진 기억에 있다고 생각하고, 기억을 만들어 주입하고, 이들의 행동을 관찰한다. 영화에서는 기억이 자신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의미한다. 우리의 나쁜 기억도 나를 완성시키는 기억이 될 수 있다.
좋은 기억으로 덮는다.
"사실 망각의 기술은 있다. 가장 훌륭한 망각의 기술은 좋은 경험하기와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기다. (중략) 모든 좋은 경험은 뇌의 영역 곳곳에 기억의 절편으로 남겨진다.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 면역체계에서 작동한다." (p.266)
두려움을 일으켰던 나쁜 기억의 맥락에서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 좋은 기억을 남기자. 이 기억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나쁜 기억에서 이겨낼 힘을 줄 것이다.
위 내용은 <<기억 안아주기>>(최연호, 글항아리, 2020)에 나오는 사례와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이 책은 현재 삼성서울병원에서 소아 소화기 영양 분야를 전공하는 교수이자 성균관의대 학장인 최연호 의사가 쓴 책이다.
소아과 의사 관점에서 나쁜 기억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기는지, 어떻게 극복할지를 설명한다. 일반적인 뇌과학 책과 다른 점은 소아과나 의사 임상 사례를 통해 나쁜 기억이 형성된 사례를 들려준다는 거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읽으면 그 사례가 남일 같지 않아 확 와 닿는다. 아이를 둔 부모에게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은 부모의 두려움으로 인한 과한 개입으로 아이에게 나쁜 기억을 심어주지 않게 할 예방주사다.
좀 더 빨리 이 책을 읽었다면, 내 아이가 어린이집을 1년에 네 번이나 옮길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여전히 난 아이가 조금 열이 올랐다고 병원에 가서 항생제를 받아 아이에게 먹이는 행동 편향을 보이는 엄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으나 내용은 전적으로 제 주관적인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