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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해 Dec 17. 2020

나의 아저씨가 보여준 인간수업

나의 아저씨 

출처: 넷플릭스

나의 아저씨(tvN, 16부작 드라마, 2018)는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아저씨 삼 형제와 사회에서 소외된 한 스물 한살 여성이 만나 서로를 통해 삶을 치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출처: tvN

이지안(이지은)은 여섯 살에 병든 할머니와 단둘이 남겨졌다. 사채빚에 시달리다 자신과 할머니를 괴롭히는 사채업자를 정당방위로 살해하게 된다. 청소년기에 발생한 일이어서 해당 정보는 봉인되어 있지만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그녀를 피한다. 자신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지만 청각 장애를 가지고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한다. 불법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한다. 정작 자신은 믹스 커피 두 봉지로 한 끼를 때운다. 돈을 좀 모았다 싶으면 사채업자가 나타나 돈을 빼앗고, 툭하면 와서 폭행을 한다. 그녀의 삶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개미지옥 같다. 

출처: tvN

박동훈(이선균)은 구조기술사다. 직업처럼 안전제일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사내 정치도 모르고 원리 원칙대로 산다. 변호사인 아내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멀리 외국에서 유학 중이다. 큰 욕심 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며 사는 그는 퇴근 후 삼 형제끼리 모여 동네 친구들과 한잔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형은 여러 장사하다 망해서 이혼당해 어머니와 살고 있고, 조감독이었던 동생은 20년 동안 데뷔도 못한 채 백수로 지낸다. 형제 중에 가장 잘 나가는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형제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사랑한다. 


지안은 동훈이 재직 중인 회사에 사무보조 파견직으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박동훈이 아무런 학벌도, 능력도 없는 이지안을 뽑은 이유는 단 하나 특기가 '달리기'여서 였다. 


동훈의 사장이 자신의 경쟁자인 상무를 내치기 위해 뇌물을 받도록 하려다 이름이 비슷한 동훈에게 그 돈이 전달되면서 시작된다. 어쩌다 그 돈을 알게 된 지안. 할머니의 요양원비 생각이 나서 훔치려다 사장에게 자신이 상무와 동훈을 모두 회사에서 나가게 해 주겠다고 제안하고, 동훈을 도청하기 시작한다. 


동훈을 도청하면서 지안은 동훈에 대해 잘 알아가게 되고, 동훈은 지안이 한 동네 산다는 걸 알게 되자 지안을 챙긴다. 동네 토박이로 살아온 동훈은 동네 동생들에게 지안을 부탁한다. 지안의 맞은편 집에 사는 동생에게 지안의 집을 지켜보라고 하고, 형제와 친구들과 함께 지안에게 사람 사는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다.


나의 아저씨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외톨이로 혼자 고군분투하며 살면서 세상이 자신을 이용만 한다고 느꼈던 지안은 동훈을 통해 어른 그리고 가족 같은 공동체의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동훈은 멋지고 잘 나가는 완벽한 어른은 아니다. 아내가 바람피워도 모르고, 사내 정치도 모른다. 갑자기 자신을 두고 스님이 된 친구에게 가끔 한탄할 뿐,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성격은 아내를 외롭게 만든다. 퇴근하며 아내에게 전화해 뭐 사갈지 묻거나 바쁜 아내를 대신 해 청소하는걸로 아내를 챙기는 마음을 드러내는게 다다. 


하지만 그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안을 챙기고, 건강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에 스며들게 해 준다. 그가 가진 힘은 끈끈함에 있다. 친구처럼 가족처럼 그렇게 지내는 이웃들과 형제들이 있다. 그 끈끈함으로 스물한 살의 어리고 상처 받은 지안을 품는다. 


그 어른도 성숙하지는 못하다. 문제가 많고, 부족한 점이 있다. 그의 부족한 점을 그의 일거 일투족을 도청을 하는 지안은 보고, 듣고 느낀다. 어른으로 '라떼엔 말이야~'라고 하면서 꼰대처럼 굴지 않아도 보고 안다. 


눈 덮인 퇴근길을 걸어가는 아저씨의 숨소리가 들린다. 지안은 그 소리를 맥심 커피 두 잔을 타며 듣는다. 힘들게 걷던 동훈은 눈 속에 넘어진다. 그는 울고 싶다.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그는 넘어진 채 하늘을 보며 숨 쉰다. 그 목소리를 지안은 듣는다. 


지안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지만 묵묵히 걸어가는 아저씨를 보며 자신도 그렇게 묵묵히 걷고 있음을 안다. 누구나 다 힘들다는 걸, 자신만의 무게를 지고 살고 있다는 걸 느낀다. 


지안은 동훈을 이용한 자신을 동훈이 용서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동훈은 계속 그 자리에 있는다. 


"진짜 내가 안 미운가?"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이 세상 살아갈 힘이 나는 건 없다. 누가 나를 알아주고 내가 무엇을 해도 받아주는 건 부모님이나 가능할 거라 생각핸던 지안. 부모가 없는 지안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동훈은 알아준다. 


아내의 외도 등으로 힘들어서 죽고 싶어 하는 동훈에게 지안은 '좋은 사람'이라고 해준다. 그 말이 동훈을 살게 한다. 동훈과 지안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힘들 때 서로 의지가 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고맙다. 고마워,

그지 같은 내 인생 다 듣고도 내 편 들어줘서 고마워.

나 이제 죽었다 깨나도 행복해야겠다.

너, 나 불쌍해서 마음 아파하는 거 못 보겠고,

난 그런 너 불쌍해서 못살겠다."


혼자가 아닌 축제 같은 장례식

출처: 넷플릭스

출산, 결혼, 장례는 가족, 친지, 지인이 모여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자리다. 그 기쁨 혹은 슬픔의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외받는 사람들에겐 그 순간은 외로운 순간이다. 


지안의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소외되고 가족도 없는 한 할머니의 죽음에 누가 와서 같이 있어주고 슬퍼해줄까? 텅 빈 장례식장에서 혼자 있을 모습이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동훈의 형과 동생인 상훈과 기훈이 바꾼다. 힘들게 청소해서 벌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데 쓰기 위해 차곡차곡 모은 돈을 지안의 할머니를 위해 쓴다. 자신의 죽음은 이랬으면 좋겠다면서 쓸쓸하지 않은 죽음을 만든다. 지안을 돕던 청소부 할아버지는 어르신이 복이 있으시다고 말한다. 


조기축구회 사람들과 함께, 동훈의 회사 사람들과 함께 북적이는 장례식장. 지안의 할머니의 장례식의 모습은 축제의 모습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장례식장 앞 운동장에서 모두가 함께 축구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곳에서 지안은 혼자가 아니었다. 공동체와 함께 있었다. 그 장면은 이 드라마의 끝을 예고하는 복선 같다. 


나는 어른인가? 


나의 아저씨가 큰 울림이었던 건 어른과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사회에 나온 청년들, 소외된 계층에 속하는 이들을 우리는 이렇게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나?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은 나도 잘 못 사는데, 나 살기도 바쁜데, 하며 외면하거나, 삐딱한 시선으로 보기 일쑤다. 


"제 몸 써서 정직하게 일하는 노동의 귀함을 설파하는 미담이 아니라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혹은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걸 복으로 알라'는 식의 괴담처럼(p.8)" 일하는 아이들을 보며 '저렇게 된다'라고 "한 아이의 삶을 부분 탈튀하여 훈육과 통제의 도구로 삼는"다(은유,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 돌베개, 2019). 


제도권 안에 있지 못하다고 비난하고 무시한다. 동훈의 부하직원들을 보면 사회의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아이들이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는 경우도 많다. 그 아이들에게 어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아저씨가 없는 인간 수업

출처: 넷플릭스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인간 수업>>(넷플릭스, 2020, 10부작)의 아이들처럼 타락하기 쉽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이 다른 학생을 성 매매를 시켜도 상관없게 된다. 이 드라마에서 어른은 없다. 도박에 눈이 멀어 자식도 버리고, 자식이 모아놓은 돈을 들고 도망가는 아버지, 자식을 자신의 틀에 맞추어 그 안에서만 키우려는 부모, 변태짓을 하는 어른들, 아이들의 성매매를 돕는 바지사장. 무엇인가 도와주려 하지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어른들만 나온다. 어른이 없는 아이들. 보고 배울, 기댈 어른이 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스스로 파멸되어 간다. 




'세상이 원래 그래, 사는 게 다 그러니까 참아.'라고 하지 않고 예민한 사람은 예민한대로 여린 사람은 여린 대로 인정하고 공감하고, 공동체 안에서 품어주는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나는 그런 어른인가?


나의 아저씨를 언급한 글 하나 더 - https://brunch.co.kr/@naomi-chun/114


(이 드라마에 나오는 아재 중심의 대사나, 당시 있었던 원조교재 등 논란, 혹은 지안의 문제가 시스템적인 문제라는 것은 논외로 하고 나의 아저씨가 보여주려고 했던 어른의 모습에 초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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