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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소해 Jun 25. 2020

가장 어려운 일

#1 이상한 렌즈 낀 앨리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나의 아저씨>> 드라마를 보았다. 거기서 주인공의 큰 형 박상훈(박호산)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

주인공인 둘째 박동훈(이선균)의 형인 박상훈은 대기업에서 영업부장 하다가 퇴직했다. 여러 사업을 했으나 다 실패하고 빚에 시달리다 아내와 이혼하고, 쉰이 가까운 나이에 딱히 하는 일 없이 노는 백수다. 빠릿빠릿하지도 않고, 게으르다. 정은 많고, 술과 친구는 좋아한다.


젤 큰 걱정은 어머니 장례식이 썰렁할까 바이다. 전 직장 사람들이 한 명도 오지 않을 걸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 나름 중견기업에 다니는 둘째에게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꼭 회사에 붙어 있으라고 한다. 막내도 영화 찍다 망했고, 계속 시나리오 쓰고 영화 찍으려고 하지만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하루하루 한심하게 보내던 큰 형과 막내는 동네 친구가 하던 청소방을 인수받아 청소를 시작한다. 한 푼 못 벌던 큰 형은 그렇게 차곡차곡 돈을 모으자 자신의 로망(007처럼 차려입고, 비싼 차를 몰고, 하루 호캉스를 보내는데 천만 원 쓰기)을 이루기 위해 돈을 모으고 방바닥 장판 아래에 그 돈을 깐다.

어느 날, 둘째 동생 회사 직원인 이지안(이지은)의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같은 동네라 안면도 있고 둘째가 챙기는 직원이라 장례식에 찾아간다. 혼자 빚더미에서 손녀 가장으로 할머니를 부양하던 손녀 가장이라 가족도 친척도 없다. 장례식장이 썰렁하다. 그 모습을 본 큰 형은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 같은 마음이 든다. 방바닥에 깔아 두었던 그 돈을 모두 털어 화한을 잔뜩 사서 입구를 채우고, 동네 조기 축구회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고 식사를 대접한다. 썰렁한 장례식장이 북적북적한다. 그 모습을 보던 큰 형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날이다!"



어느 날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콘택트 렌즈가 눈에 끼워진 것 같은 때가 있다. 한번 끼워진 렌즈는 빼기도 어렵다. 원래 눈인 것처럼 찰싹 붙는다.


이 렌즈를 끼면 내가 싫다. 눈은 더 작아 보이고, 피부는 더 나빠 보인다. 몸은 뚱뚱하기 그지없다. 입는 옷도 다 촌스러워 보인다. 말하는 말투, 행동도 모두 다 이상하고 어색해 보인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찮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멋있어 보인다. 나만 조명 없이 적나라한 렌즈로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스노우앱이나 포토샵 처리한 것처럼 뽀샤시해 보인다.


이상한 렌즈 낀 엘리스가 되고, 이 세상에서 가장 덩치 큰 쭈구리가 된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이 렌즈 속 세상을 벗어나긴 힘들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사랑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최근에 이 이상한 세상에 있었다.


그러다, 부고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알던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이 소식을 전한 친구도 몇 년만이다. 대학 내내 친했던 친구들. 매일 같이 술 먹고 놀러 가고 이야기하고 웃고 울었다. 젊은 시절의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바쁜 30대를 보내느라 몇 년 동안 얼굴 조차 보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벌써 40대. 드라마처럼 부고 소식으로 10년 만에 얼굴을 보았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 그 때 함께 했던 시간이 있는 길이다. 그렇게 자주 다니던 길인데, 오래간만에 오니 낯설다. 기억과는 다르다. 그래도 운전하는 길 따라 시간도 과거로 회귀한다.


"반갑다."


슬픈 자린데 반가움이 더 크다. 10년 만인데, 어제 본 것 같다. 기억 저편에 가라앉아 있던 추억들이 떠오른다. 서로의 흑역사, 재미있었던 이야기... 회자되고 회자되었던 이야기인데, 다시 해도 즐겁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는 숨기고 싶은, 그때의 나를 아는 친구들과 그때의 나를 만난다.


어제 만났던 것처럼 한참 이야기 꽃을 피운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 시간을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좋네."


나도 모르게 툭 진심이 나온다.


"그래 다들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알자나.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 택시만 타면 왕년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 마음을 이제 알겠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비도 오고 어둡다. 차선도 잘 안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눈 앞이 맑아진다.


아, 렌즈가 벗겨졌다.


그냥 내가 보인다. 그때의 내가, 그리고 그걸 지내온 지금의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된 하루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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