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오미 Jun 22. 2021

결국 미국에서 두 번째 편입…

..을 했지만 그곳에서도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F학교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T학교에서 갑자기 합격 연락을 받았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무서웠다. 이 선택이 옳기를 바라며, 이 길이 바른 길이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도만 했다. 정말 간절히.


그렇게 합격 연락을 받은 당일, 나는 F학교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바로 다음날 그곳으로 출발하는 고속버스 표를 끊었다. 그리고 F학교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의 동생들과 함께 보냈다.


다음날, 나는 T학교가 있는 텍사스주로 혼자 캐리어 두 개와 배낭을 이고 지고 11시간의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는 일정을 가지고. 출발하려는 찰나에 문득, ' 진짜 뭐하는 인간인가, 정신 나간 거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이 드는 순간까지도 나는 우연히 응원과 위로까지 아버렸다.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을 태워주셨던 우버 (카카오 택시 같은) 기사님과 소소한 대화를 통해 그분이 하필이면 간호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안 볼 사람이니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던져보았다. ' 외국에서 온 간호대생인데 진짜 너무 무섭다고. 내가  길을 가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그랬더니 처음 보는 사람이 신세한탄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받아들이기는커녕, 나보고 '네가 간호의 길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네가 미래에 만나게 될 환자들과 너의 직업을 사랑할 줄 아는 간호사가 될꺼같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간호사는 너의 삶에 엄청난 가치를 더해 줄 거야. 응원해!'말씀을 하셨다.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한번 서서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힘차게 달릴 수 있도록 또 한 번의 엄청난 힘이 되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마지막 날까지 학교 출판사에서 알바를 하고 -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싸고 - 혼자 20킬로의 캐리어 두 개와 배낭을 메고 우버를 거쳐 - 11시간의 버스를 타고 플로리다에서 텍사스로 넘어와 - 아는 지인분의 댁에서 며칠 신세를 지고 -  바로 4시간의 이동을 해서 - T학교에 도착을 하는 일정을 소화를 하게 되었다. 헥헥…


T학교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적응했던 미국 학교생활은 포맷이  기분이었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처음부터시작이었다.  싫었다. 나는 옮겨 다니는 것을 정말 싫어하며, 변화도 싫어하고, 낯가림도 심해서 사람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한다. (이런 사람이 호텔리어와 승무원을 했다니...라는 생각이  스스로도 자주 든다.ㅋㅋ) 그래서인지 아니면 T학교로 오기까지 워낙에 장시간의 고생을 해서인지, '간호가 뭐길래 내가 이렇게까지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으로부터 이어진 인생의 해탈함을 껴안고 도착을 했고, 학교에 대한 첫인상이 그다지 인상 깊지는 않았다. 아니, 그보다 첫인상을 누릴 틈이 없었던 거 같다.


도착하자마자 학교 재편입 접수하랴, 학생증 받으랴, 수강신청하랴, international office registrar office 왔다 갔다 길도 모르는 학교에서 무작정 뛰어다니면서 학점 인정받으랴, 기숙사 입주 서류 작성하고 입주하랴, 학교가 문 닫는 오후 5시까지 쉴틈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첫날이었다. 그래도 무사히 모든 일을 간신히 해결하고 배정된 기숙사를 찾아 들어갔다. 아무래도,  날에 대한 기억은 무지하게 더웠었다는 게 제일 크게 기억에 남는 듯하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었는데, 땀이 그다지 안나는 체질인데도 불구하고 옷이 축축해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미국에서의 나의 두 번째 학기가 시작이 되었다. 사실 T학교에서는 마음이 이전보다 조금은 더 편할 줄 알았지만, 전 학교보다 더 서럽고 억울하고 힘든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유학생의 삶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싶었다. T학교에서도 정말 많이 울며 시작을 했고, 많이 괴로워하며 지냈었지만, 최대한 버티려고, 잘해보려고 매일 새로운 다짐의 연속의 시간을 보내며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언제쯤 내 인생이 평안해질지, 평범해질지, 잔잔해질지 궁금함을 가지고 매일을 지냈지만, 그런 어려운 시간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있기를 바라며 하루씩 버텼다.




T학교에서 나는   학기를 다니게 되었다. 미국은 학교마다 다르지만 '여름학기'라는 학기가 대부분 존재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여름 계절학기의 느낌이다. 근데  학교는 특이하게도 여름학기가 6주씩 두 번으로 해서  학기로 나뉘었다. 그래서 나는 12주, 총  학기를 이곳에서 다니게 된 셈이다. 그리고  학기 개념이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내가 목표로 하고 있던 학교의 간호학과를 준비하면서 필요했던 선수과목과 필수과목의 학점을 모두 채울  있었다. 12 동안 말도 안 되게 죽을 듯이 힘들었지만, 여름학기가  학기로 나뉘는  학교의 시스템이 지나고 나니  다행이었구나 싶다.


예전에 플로리다 F학교를 시골 깡촌에 위치한 학교라고 소개를 했었는데, 그에 비하면 여기 T학교는 시골 깡깡 깡촌이었다. 정말로 ---무것도 없었다. F학교를 정말 불만족스러워했던 내가, 여기 T학교에 와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는듯한 느낌이 종종 들기도 했다. 차가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동네이고, 나는 차가 없는 뚜벅이였기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지냈다. 정말-너무-지나친 시골 동네여서, 한국인은  하나, 그리고 동양인은  포함 두 명이었다. 다행히도  나머지 한 명의 동양인은 일본인인  룸메였다. 아무래도 학교 측에서 나름 배려를 해준 게 아니었나 추측을 해본다. 동양인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동네는 90% 흑인이었다. 물론 편견이겠지만, 무서웠다. 아니, 편견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을 상대로 나에게 무서운 사건들이 일어났었기 때문에  무서웠었다.


학교 수업은 내가 16 코스를 6주 만에  4개의 과목을 들어야 했기 때문에 공부량과 시간적인 압박에 많이 힘들기는 했지만, 공부 내용 자체가 엄청 어렵지는 않았다. 점수도 비교적 후하게 주시는 거 같았고, 학교의 위치와 여름학기라는 이유 때문에 학생수도 적어서 교수님과의 친밀도는 일반 대학과는 훨씬 높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만났던 교수님께서는 내가 외국인이어서 차별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배려를 많이 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나를 대해줘서 정말 다행이고 감사했다. 아무래도 이건 학교 특성이라기보다는 교수님을  만난 덕이 큰 거 같다. 그래서  덕을 최대한 누리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수업 마치면 도서관이나 기숙사 밖에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수업 마치면 두세 시간은 교수님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내가 사실 평소에는 어디 가서 '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라는 말을 양심적으로 찔려서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여기 학교에서는 진짜 최선을 다해서 버티고 노력했다고 말할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루가 두려워서 매일을 눈물로 시작했지만, 울면서라도,  악물고 죽네사네 거리면서라도,  어느 누구도  마음을 몰라줘도,  순간을 혼자 악착같이 버텼다는 것을  자신이 제일  알기 때문에 더욱 수고한 T학교에서의 두 학기였다고 생각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