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사몽 & 애매모호

정읍 여행기, 내장산 생태탐방원

by 라미루이





정읍에서 묵은 숙소는 '내장산 생태탐방원'이었다. 단풍 생태공원과 내장호를 내리보는 고지대에 자리 잡아 전망이 수려하다. 뒤로는 서래봉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이 감싸고 있어 대낮에도 선선한 바람이 살랑댄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 대유행을 겪은 데다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장기간 찾는 이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내부 시설은 깨끗하고 취객 등의 험한 손길을 탄 흔적이 없다. 복층으로 격리된 구조의 생활관은 최신형 티비에 와이파이까지 설치되어 이용에 불편함이 없다. 냉방은 천장에 설치된 시스템 에어컨, 난방은 지열을 끌어올려 이루어진다. 뒷산을 바라보는 통창을 열면 내장산 깊은 골짝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시원하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듯하다. 곳곳을 살피면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출입문 바로 위에 진갈색 그늘막을 설치해 무더위를 잠시나마 피할 수 있다. 더불어 쨍한 직사광선에 철제문 손잡이가 지나치게 달궈짐을 막을 수 있으리라. 그늘의 너비를 조절할 수 있는 블라인드 전면에 되새길 만한 문장이 눈에 띈다.

"여기 이곳, 오늘의 나를 찾아볼 수 있는 공간"


여기 드는 이들은 이곳에 묵는 동안, 진정한 나를 찾아 여행하는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는 주인장의 사려 깊음이 묻어난다. 거실에 들어서면 널찍한 원목 테이블이 오늘의 손님들을 반긴다. 시장기를 해결하는 식탁, 어색함을 깨고 분위기를 업시키는 주안상 그리고 둘러앉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탁자로 쓰임새가 무궁무진하겠다. 허나 주인장은 테이블 위 바구니 안에 두꺼운 시집을 비롯한 몇 권의 책을 비치했다. 대면하여 캐묻지 않아도 면식 없는 그의 의중은 대충 이러하지 않을까?

번잡한 도시를 떠났으니 티비와 스마트폰 등 일체의 전자 기기는 멀리하게. 반듯하게 다듬은 목탁에 잡스런 먹을거리와 제정신을 흐리는 독주는 치우세. 꾸린 짐은 가득해도 정작 중요한 양식은 두고 왔을까 하여 책꾸러미를 가져다 놓았네. 드문드문 마음이 가는 구절을 읽다 눈이 침침하면, 신록이 넘치는 저 숲을 바라보게나. 충혈된 눈자위 저 아이들처럼 새하얘지고 시야가 확 트일 테니. 혹여 험난한 운전길에 여독이 풀리지 않는다면 창문을 살짝 밀고 대청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청하게. 어느새 다다른 꿈결, 가까이 다가와 지저귀는 이름 모를 새소리, 단풍목 가지 흔들어 사근대는 바람 소리 유난히 크게 들려도 놀라지 말게. 한낮 깊이 잠들어 첫 밤부터 잠 설칠까 염려해, 조심스레 어르고 일깨우는 봄여름 산야 맑은 목소리일 테니..






잠시 후 아이들은 티비를 켜고 눈이 뱅뱅 돌아가도록 현란한 애니에 빠졌다. 아내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폰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주변의 들릴 만한 트렌디한 장소 아니면 핫한 맛집을 찾는 것이 분명하리라.

난 밖으로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 위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이정표에 '명상의 숲'이라 새겨져 있다. 멀리 낯선 객지에 이르러, 설레면서도 갑갑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외지 등산객의 분주한 발길이 닿지 않아 수목이 빽빽하다. 오가는 인적은 없다. 갈수록 그늘이 짙어져 어둑하니 홀로 걷기 두려울 지경이다.

정비되지 않은 등산로는 좁아지고 경계가 사라져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걸음을 옮겨야 할 판이다. 뒤통수가 서늘해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얼핏 바라보기에 야트막한 산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안에 들어오니 산세가 빈틈없이 조밀하다. 일체의 빛을 삼킨 야생의 그림자 속에 무엇이 숨어 도사릴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앞을 헤치고 나아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난데없이 "와드득!"

으슥한 저 편에서 들리는 기척에 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난 그 소리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아내가 곤히 잠에 들 때 어금니를 가는 소리. 잠귀가 밝은 난 그녀가 벅벅, 이를 갈 때마다 잠을 깨어 그녀의 등이며 어깨를 두드리곤 했다. "으음, 깨우지 마." 뒤척이며 돌아눕는 아내의 신경질적인 잠꼬대.

곧이어 "바득바득!"

누군가 작정하고 이빨을 부딪는 마찰음. 거친 맷돌이 알곡 없이, 쌩으로 날로 맞돌며 위아랫돌이 갈리는 둔탁한 음을 닮았다. 부싯돌처럼 시퍼런 불꽃이 튀도록 맞부딪는, 어딘가 숨어 먹잇감을 노리는 날짐승의 음험한 송곳니 한 쌍이 드러난다.

스슥, 파사삭.. 사주 경계에 능한 네 발 달린 고양잇과 맹수의 움직임. 녀석의 신중하면서 조심스러운 발 내딛음. 하지만 방심했는지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사방에서 할퀴는 냉랭한 기류에 온몸이 사무친다 느낄 즈음, 겁에 질린 난 발걸음을 돌렸다. 분명 무언가 있어. 무방비의 날 노리는 살기등등한 무언가가, 저 나뭇등걸 뒤에 몸을 숨기고 날 노려보고 있어. 점점 걸음이 빨라진다. 가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댄다. 속도를 높여 뛰다시피 왔던 길을 되짚다가 하마터면 돌부리에 걸려 자빠질 뻔했다. 기가 질려 감히 뒤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난 정체 모를 추격자에게 덜미를 잡혀 어딘가로 끌려가리라. 그 후에는 나라는 존재를 남김없이, 게걸스레 먹어 치우겠지. 완전무구한 무로 먼지가 되어 흩어질 때까지. 누구도 내가 여기 머물렀음을 알아채지 못할 거야. 가족들 또한 아빠 없이 살아감을 당연스레 여길지도 모르지.

까르르, 등 뒤에서 솔과 연의 웃음이 터진다. 아빠, 어디 가? 우리랑 신나게 춤추며 놀아야지. 밤새도록 말이야. 으하하.. 난 두 귀를 틀어막고 앞만 바라본다. 정신 똑바로 차려. 어떻게든 여기서 달아나야 해.

그르르르, 끄윽. 딸꾹. 익숙한 소리다. 얘야. 밥만 먹으면 명치가 답답한 게, 딸꾹질이 종일 멈추질 않는구나. 내 등어리 좀 쓸어내려 주겠니? 트림도 안 나오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십여 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 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돌리려다 말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착각이고 환청이야. 생사람 발목 잡고 맨 정신 홀리는 이 산에서 어서 빠져나가자.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보폭을 넓히며 산길을 달렸다.



으스스한 그 산에서 도망쳐 난 애초에 왔던 곳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눈부신 밝음으로. 한 치 앞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서 익히 아는 명명백백한 세상으로. 가족들이 기다리는 따스한 그곳으로.

그 와중에 액을 물리는 부적 삼아 몇 마디를 지어 주문처럼 되뇌었다. "기력이 쇠하고 담이 약한 자는 함부로 이 산에 들지 말지어다. 타고난 담력이 세고 기골이 장대한, 길눈 밝은 노련한 산꾼들과 무리 지어 동행하던가 아니면 분수를 알고 멀찍이 험한 산세를 바라보는 것에 만족할지니. 부디 중도에 등을 돌린 자에게 벼린 발톱을 세우고 섬뜩한 이빨을 번득이지 않기를.." 사정없이 달려들어 길을 막고, 온몸을 긁던 주변의 성마른 나뭇가지들이 뒤로 물러선다. 이 산에서 떠남을, 빠져나감을 마침내 허락받은 것처럼 멀리 터널의 입구가 점으로 보인다. 점차 다가오며 밝아진다.



얼마쯤 지났을까. 출발지의 푯말이 자리한 곳에 다다르니 금세 사방이 환해진다. '명상'의 숲이라니..

도리어 마음이 어질하고 심란해졌다. 낯빛은 사색으로 질렸다. 화들짝 놀란 마음에 오늘 밤 제대로 잠을 청할 수나 있을까 싶다. 야수의 기세로 다가온 그 녀석이 혹시나 내 뒤를 쫓은 건 아닐까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온 사위가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하다. 불어오는 미풍에 무성한 잎들 사이로 내리쬐는 빛살이 잔잔히 흔들릴 뿐이다. 겨우 안심하고 숙소로 향한다.

가까운 발치에 이름 모를 꽃무리가 눈에 띄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길게 뻗은 줄기마다 두세 송이 샛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은근히 유혹할 것처럼 빙그르 휘말린 치맛폭, 봉긋 부푼 자태로 보아 희귀한 꽃임에 분명했다. 다음 날 노랑노랑 귀티 날리는 그 꽃 다시 보고 싶어, 사진으로 남겨야겠다 싶어 그 자리 찾았지만 잡풀만 무성했다. 이리저리 두리번대고, 허리 낮추어 샅샅 훑어도 도무지 자취를 찾을 수 없더라.



그제야 꿈에서 깬 듯, 아닌 듯. 애초에 어딘가 머무르고 떠난 적은 있는지..

모든 것이 애매하고 흐릿하다. 어렴풋하기만 하다.







내장산 생태탐방원 주변은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된 '노랑붓꽃' 자생지입니다. 혹시나 마주치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못 본 척 슬쩍 지나치셨으면 해요.


근래 묵은 숙소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내장산 생태탐방원



* <Fear of the Dark>_Iron Maiden

https://youtu.be/6PDMtqejN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