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제일의 사찰을 둘러보고..

구례 여행기_화엄사에 들르다

by 라미루이






구례에 머무른 마지막 날, 화엄사로 향한다. 이십 년 전,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그의 후광으로 자유로이 출입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해진 입장료를 지불하고 벚나무가 줄지은 도로를 오른다. 첫 번째 다리에서 꺾어지면 '한화 리조트'로 들어설 것이다. 구례에 머물 적, 별빛 창창한 밤이면 아버지가 종종 이곳에 들리자 하여 1층 카페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온 가족이 탁자에 둘러앉아 시원한 팥빙수도 먹고, 새콤달콤오미자차도 마시고 그랬다. 그때는 주말에도 한적하고 인적이 뜸했는데 지금은 몰려든 인파로 붐빌지도 모르겠다.


화엄사 일주문의 편액은 여전히 힘찬 기운을 뿜으며 우리를 굽어본다. 우에서 좌로, '지리산 화엄사'란 글이 세로로 써져 있다. 당대의 명필로 이름난, 선조의 여덟 번째 서자인 의창군 이광이 1636년 남긴 글씨다. 이 문을 넘으면 해탈의 경지에 일보 다가설 수 있다 하여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문턱을 넘어 경내에 들어서면 우측에 누군가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보인다. 1951년, 지리산 곳곳에 빨치산이 숨어들자 근거지를 뿌리 뽑기 위해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당시 소탕을 책임지던 '차일혁 경무관'은 고심 끝에 이를 따르지 않았다. 태우는 시늉을 하기 위해 화엄사의 문짝을 떼어다가 한데 모아놓고 소각했다고 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천년의 역사를 지닌 고찰은 임진왜란에 이어 또 한 번 화마에 휩싸였을 것이고, 목조 건물은 죄다 스러져 지금의 고고한 자태를 엿볼 수 없었으리라.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다. 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

그가 남긴 말이다. 화엄사는 고인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사찰 입구에서 멀지 않은, 양지바른 곳에 그의 공적비를 세웠다.


고 차일혁 경무관의 공적비에 새겨진 어록


화엄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외곽을 두른 담장이 높다. 남도의 길목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략이 잦은 탓에 방비를 강화하는 목적도 있고, 화마火魔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산수山水의 기운을 가두려 담을 높였다는 설도 있다. 화엄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를 보면 지리산 자락에서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거대한 배의 형상을 닮았다. 그런 의미에서 곳곳의 지하에 묻은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화를 물리치는 한편, 수의 기운을 보강했다. 당간을 받쳐 세우는 석조 기둥은 돛대의 형상으로 속세를 떠나 열반하고자 하는, 불생불멸을 꿈꾸는 대도량의 염원을 담았다.


화엄사의 당간지주


화엄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국란이 터질 때마다 승병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요충 기지로 쓰이곤 했다. '구시'라 하여 출정을 앞둔 승병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는, 기다란 구유 형태의 목조 그릇이 남아 있기도 하다. 아마도 몇십 명의 승병들이 달려들어 한꺼번에 끼니를 때우도록, 7 미터가 넘는 구시 안에 밥과 나물 등을 쏟아부어 장과 함께 비벼 먹는 장관을 연출했으리라. 지금은 세월이 흘러 밑바닥이 삭아 훤히 뚫렸지만, 당시의 급박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승병을 이끌고 왜구의 침략에 맞서고, 주요 사찰의 중건을 지휘한 벽암 대사를 기리는 '벽암국일도대선사비'는 용거북 형상의 바닥돌이 위엄이 넘치고 웅장하다. 아마도 옆구리에 두 날개만 달아주었다면, 무거운 비석을 짊어지고 그대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위세를 뽐냈을지 모른다.


승병들이 배고픔을 채운 구시. 지금은 그 밑바닥이 내려앉아 훤히 뚫렸다.


벽암 대사를 기리는 대선사비


성보박물관 옆에는 거대한 벼루 모양으로 파낸 듯한 바위가 놓여 있다. 자세히 보면 뭇사람들이 공들여 다듬은 흔적이 완연하다. 1942년 일제의 수탈과 횡포가 극에 달하던 시절, 화엄사의 몇몇 스님들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묘수를 짜냈다. 일본인들이 두려워하는 두꺼비 모양으로 깎은 바윗돌을 경내에 우뚝 세워 그네들 쪽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당시에 일본 헌병들이 소문을 듣고 현장에 들이닥쳤는데, 새와 다람쥐들에게 공양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사각으로 반듯하게 파낸 모양을 보여주었다 한다. 다행히 무탈하게 넘어간 덕에, 일제는 몇 년 후 패망을 맞이했고 아직까지 이 '두꺼비 바위'는 남쪽을 바라보며 일본의 기세를 억누르는데 공헌하고 있다.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남쪽을 바라보는 두꺼비 바위. 애초에 각황전 앞에 놓여 있었다 한다.


대웅전과 각황전에 이르기 전, 보제루를 거쳐야 한다. 보제루의 기둥과 주춧돌은 지진과 세월의 흐름에 따른 마모를 견디기 위해 '그렝이 기법'으로 세워져 있다. 다듬지 않은 두툼한 원목을 세워, 그 아래 주춧돌 사이에 소금을 반죽하여 거듭 바르고 밀착시켰다. 덕분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견고하고 일체의 뒤틀림과 들뜸이 없다. 나무와 돌이 한 몸처럼 자리하여 복층 누각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이러한 건축 기법은 비슷하게 따라 할 재간이 없다. 오로지 우리의 옛 장인만이 이러한 지지 공법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듬직한 루의 기둥에서 눈을 돌려 우측으로 빙 돌아 나아간다. 다른 사찰은 중심 법당인 '대웅전'을 맞이하기 위해 허리를 숙이고 누각의 아래를 파고드는 발걸음을 이끄는데, 화엄사는 그렇지 않다.

혹자는 이러한 배치를 두고, 각황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대웅전을 시야에 먼저 들게 해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동선 짜임이라 평한다.


그렝이 기법으로 지어진 보제루의 기둥




중앙에 위치한 화엄사 대웅전은 사방으로 뻗은 팔작지붕이 후방의 지리산 능선과 어울려 어깨동무를 한 것처럼 친근하다. 명산의 경치를 거스르지 않고 산세를 흩트리지 않으려, 그 품에 묻힌 것처럼 의도적으로 칸을 좁히고 몸을 웅크린 모양새다. 반면 측면에 자리한 각황전은 작정하고 도량의 기세를 안팎으로 떨치려는 품새다. 전면에 위치한 거대한 석등을 보라. 다소 비대한 몸집의 석등은 옛 각황전이 보다 장대한 법당이었음을 유추하게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무려 3층 높이의 장육전을 세우고, 내부 사면의 벽에 화엄경을 새겼다고 한다. 통일신라 문무왕 17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각황전 내벽에 블록 형태의 석경을 새겨 빽빽이 사면을 메웠다고 하니.. 그 권위가 어떠했을지 감히 짐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금은 단지 파편으로 남은, 석경 몇 조각이 남았을 뿐이니 세월의 무상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은 좌우 4량이요, 각황전은 3량이다. 이도 대웅전을 보다 부각하기 위한, 의미 있는 설계라 볼 수 있다. 앞마당에는 동서에 오층 석탑이 나란히 보이는데, 쌍탑 중 서탑은 기단이 2단이고 조각과 장식이 보다 화려하다. 아무 의도 없이 두 탑의 외관을 달리 꾸미지는 않았으리라. 95년, 서탑의 보수 작업을 하다 탑신에서 다라니경과 다수의 사리가 든 병을 발견했다. 더불어 기단 지하에서 청동 방울과 칼, 수정 등 일체의 사리장엄구를 찾았다 하니 유서 깊은, 귀중한 보물이라 하겠다.


대웅전 안에는 화엄사상의 삼신불인 비로자나, 노사나, 석가불이 모셔져 있다. 이로 인해 화엄사 대웅전은 '대웅보전'이라 격을 높여 칭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현생에 죄가 많은 이는 함부로 발을 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법당 내부는 위압감이 서려 있고, 엄숙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문 바깥에 서서 간단한 기도를 드리고 발걸음을 옮긴다. 사찰 내부는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이국의 손님들도 몇몇 눈에 띈다. 대부분 마스크를 벗고 표정을 환히 드러내며 자유로이 활보한다. 코로나의 기세가 마침내 꺾여 물러난 듯 하니, 넓은 마당에 '영산회 괘불탱화'가 걸릴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예상치 못한 돌림병으로 억울하고 비통하게 죽음을 맞은 수많은 넋을 달래는 진혼제를 올리고, 그야말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떠는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화엄사의 대웅전(좌)과 각황전 전경



대웅전 앞마당 동서로 자리한 오층 석탑. 좌탑이 더 화려하다.


각황전 앞에서 가족 사진을 남기다.


각황전 오른편에는 이제는 한그루만 남은 홍매화가 껑충한 수령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매화가 한창이면 그 색이 유난히 검붉다 하여 '흑매'라고도 부른다. 아쉽게도 지금은 꽃 피는 철이 아니라 고목 아래 중생들이 안치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대신 구경했다. 솔과 연이 쪼그려 앉아서는 조그만 아이들이 부엉이인가 올빼미인가를 두고 갑론을박, 말싸움을 벌이려 하기에 뭔들 어떠랴, 둘 다 옳다 이르고는 자리를 떴다.




아이들을 데리고 각황전 왼편의 계단을 오른다. 솔과 연은 엉금엉금 계단을 오르며 개수를 세고 있다. 분명 중도에 셈을 까먹고 잊은 듯한데 어림짐작으로 '108개'라고, 틀림없다고 외친다. 가파른 층층 계단을 천천히 오르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온갖 번뇌가 잠시나마 사라지는 듯싶다. 평지에 다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굽이굽이 몸을 뻗은 노송이 둘러싼 고지에는 '사사자 삼층석탑'이 자리해 이제야 왔냐며 반긴다. 기나긴 보수를 마치고 1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국보다. 솟은 자리 또한 노른자위 명당에 속하는, 화엄사 경내와 멀리 지리산 줄기를 바라보는 고지대에 위치한다. 기단 상층에는 암수 두 쌍의 석사자가 탑신을 떠받치는데, 희로애락을 상징하는 입 모양이 각기 다르다고 한다. 그 중앙에는 어느 비구니가 합장을 한 채 석탑을 지지하고, 탑 정면으로 석등을 머리에 이고 있는 스님이 꿇어앉아 있다. 세속을 등진 어머니를 따라 이곳에 들어와 절을 세운 '연기 조사'의 효성을 탑과 석등으로 형상화한 걸작이라 하겠다.


국보, 사사자 삼층 석탑


108 계단을 오르는 아이들.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슬슬 내려갈 채비를 한다. 아이들은 내려갈 때도 네발짐승처럼 기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우길래 딱 잘라 끊었다. "안 돼! 몸 다치면 여행도 못 다닌다." 아이들은 군말 없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간다. 화엄사 곳곳에는 목을 축일 수 있는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다. 솔과 연은 바가지에 맑은 물을 따라서는 벌컥 들이킨다.

아이, 시원해! 절로 감탄사가 터진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물 맑기로 이름난 곳이다. 졸졸 흐르는 산물은 밤새 냉장고에 보관한 것처럼 청량하다. 갈증을 달래고 발길을 옮기니, 처마 위에서 눈치를 보던 비둘기 몇몇이 휘휘 내려와 약수를 찍어 맛을 본다. 그렇지. 이곳은 사람뿐만 아니라 산사가 품은 모든 생물이 목마름을 해소하는, 넉넉한 불심을 지닌 곳이렸다. 아무도 저 금수를 꺼리지 않고, 손을 휘저어 저리 가라! 내치지 않는다.

저 비둘기들의 꼬리깃은 순백의 깃털이 뚜렷하다. 도심에서 흔히 보는 집비둘기라 업신여기면 절대 안 된다. 낭비둘기 또는 양비둘기라 부르는, 개체수가 얼마 남지 않은 희귀한 멸종 위험 조류이다. 오직 지리산 근처, 여기 화엄사에서만 접할 수 있는 영물이니 귀하게 대해야 마땅하다.



넘치는 불심으로 이 곳을 찾는 모든 이들은 시원한 약수를 맛볼 수 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가 아쉬워 화엄사 옆을 흐르는 계곡물을 찾는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마땅치 않아 한참을 걸어서야 무너진 축벽을 발견했다. 지리산은 험하기로 이름난 산이다. 계곡을 가득 메운 바윗돌은 큼직하고, 딛는 걸음이 서투르면 미끄러지기 일쑤다. 발목을 삐끗하지 않게 조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아이들은 장난감 물총에 물을 채워 서로를 흠뻑 젖게 하고, 이리저리 도망 다닌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물총 세례를 맞곤 아이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아이들은 싫증이 났는지 주차장으로 돌아가자 한다. 아쉽지만 구례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지금 이 계곡은 인적이 드물지만, 한여름이 되면 곳곳에 족욕을 하고 물장구를 치는 인파로 떠들썩하리라. 난 맑게 흐르는 물을 괜스레 휘저어 아이들을 향해 튀기고는 엉거주춤 일어섰다.


화엄사 계곡에서 즐거운 한 때



마지막으로 구례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냉면집에 들렀다. 미리 주전자에 담아 올리는 따뜻한 육수를 마시면 속이 스르르 풀린다. 난 개운하면서 매큼한 다대기 물냉면, 아내는 푸짐한 회냉면을 시켜 나누어 먹는다. 아이들은 만두를 시켰더니 마다하지 않고 잘 먹는다. 대접을 들어 육수를 입안 가득 들이키면, 제법 깊은 맛이 우러나고 잡다하게 들러붙는 뒷맛이 없다. 바로 뽑은 듯한 면은 가늘지만 쫄깃하고, 너무 질기지 않아 오래 우물거리지 않아도 된다. 냉면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우고는 입맛을 다신다.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만, 아이들은 당장 내일이면 학교에 가야 하고 우리들 또한 일상을 이어가야만 한다. 멋 모를 젊을 적, 내 아버지를 따라 물 맑고 공기 좋은 이곳에 터를 잡고 맘 편히 머무를 때가 극락이었다. 호시절이라 부를 만했다. 내 곁에 머무르는 온 가족을 책임진다는 개념이 생소하던 무렵, 되돌아보고 또 보아도 혈혈단신으로 버티던 그 시절이 화양연화였다.

한없이 가볍던, 어디로든 훌훌 떠날 수 있었던. 굳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나 혼자는 감당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대책 없이 떠돌던 그 시절은 다시 찾아오지 않으리라. 그립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시원하게 냉면 한 사발 말아먹고 집으로 갑니다.







* 지리산 화엄사 화엄음악제 2018, 진혼(鎭魂) 영산괘불대재>>

https://youtu.be/BsSMxjTkpj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