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정오가 지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경쾌한 실로폰 소리. 이어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티비에서 울려 퍼진다. "전~국, 노래자랑!". 30여 년 넘게, 때와 장소는 달라도 한결같은 오프닝이었다.
이후에 펼쳐지는 막장 쇼는 나른한 주말 오후를 들썩이게 했다. 지긋한 연배의 사회자는 툭하면 참가자와 만담을 섞었다. 그는 타고난 입담이 구수했고, 뭇사람을 절로 웃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각지의 사투리가 뒤섞인 농지거리가 난무했다. 그러다 보면 무대 공포와 과한 긴장으로 어색했던, 굳은 참여자들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흥겨운 뽕짝이 흐르면 메인 MC는 연주자에 음향 감독이며 카메라 감독을 무대 위로 올렸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같이 어울려 춤추고 노래했다. 어느새 청중과 스탭, 공연자와 연주자 사이의 경계가 사라졌다. 무대 안팎을 뛰어넘어 한데 어울리는 난장亂場이 벌어졌다. 한국인 특유의 흥과 끼가 어울려 대폭발 하는 현장이 전국에 낱낱이 방송되었다. 대낮에 강소주라도 걸쳤는지, 불그레한 낯짝에 난삽하게 차린 각설이가 무대로 튀어나와 개다리춤을 추며 어설픈 유행가를 불렀다. 꽹과리를 요란스레 갈기는 녀석이 들러리로 따라붙었다. 한 소절 끝나기도 전에 땡! 가차 없는 실로폰 소리가 울리자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졌다. 티비 앞에서 넋 놓고 난장판을 지켜보던 우리는 박장대소하며 방바닥을 굴렀다. 일부러 음치, 박치에 허당끼 넘치는 진상이며 취객 몇몇을 추려서는 본선 무대에 올리는 것만 같았다.
반면에 유명 프로 가수 뺨치는 절창을 선보여 관객의 탄성을 이끌어 내고, 끝까지 완창 하는 실력파도 부지기수였다. 운이 따른 이들은 대상 트로피를 거머쥐고 꿈에 그리던 가수 생활을 시작하기도 했다. 80년 11월부터 40년 넘게 장수한, 요상 망측하면서도 괴랄한 장기자랑 쇼를 난 매주 찾아서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홀로 나주 고향땅을 지키셨던 친할머니, 명절마다 찾아뵙던 상계동 큰어머니와 같은 윗세대 분들에게는 일요일 점심 무렵, 동네 지인들과 티비 앞에 둘러앉아 의례적으로 참여하는 일종의 종교의식과 같았다. 경건하면서도 광적인 한편 익살스러운, 한 주간 쌓인 애살을 풀이하는 민간 집단 신앙의 산실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주말마다 각지를 유랑하며 벌어지는, 가무와 온갖 잡기를 뽐내는 로컬 페스티벌 같다고나 할까. 마치 우리 세대들이 토요일 오후면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 만사 제치고 모여 앉았듯이 말이다.
축제의 진행을 맡은 노련한 사회자는 요즈음 아이돌이나 진배없었다. 그는 영원한 오빠이자 최고의 개그맨 그리고 국민 MC 였다. 지금의 유재석과 같은 존재라 여기면 되겠다. <전국노래자랑>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름. 일요일 오후를 책임지던 터줏대감이자 명 사회자 '송해'.
오늘 그가 향년 95세로 별세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5년만 더 건강한 삶을 누리셨으면 상수上壽를 채우고 은퇴하셨을 텐데, 코로나 대유행의 여파가 그를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다.
내게 있어서 그는 영원한 동네 옆집 할아버지였다. 한적한 시골 마을 도로변, 굵은 떡갈나무 아래 자리한 구멍가게 아니면 복덕방을 지키던 어느 주인장을 닮았다. 홀로 쪼그려 앉아 평상을 지키고 있으면 다가가 길을 묻고는, 그대로 주저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 보따리 속 감춰놓은 요깃거리라도 있으면 절반을 뚝 떼어 나누어 주고 싶은 이. 진작에 돌아가신, 그리운 외할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였다.
땅달막한 몸집에 시골집 어린 강아지를 빼닮은 귀염한 얼굴상. 누군가 그를 웃기면 동그란 뿔테 안경알 뒤로 초승달 마냥 눈매가 휘어지는 것이 친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느 아줌씨는 무대에 올라서는 노래 재주를 보이지도 않고 다짜고짜 고깃쌈을 싸서는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런가 하면 누구는 포도에 엿, 곶감, 복분자 같은 각 지역의 특산물을 잔칫상에 늘어놓고 그에게 권하기 바쁘더라. 그는 성가시거나 난감한 기색 하나 없이, 그 음식들을 맛보며 특유의 입담으로 그 맛을 칭찬하고 하늘 아래 일품이라 추켜세웠다.
도저히 억누르기 힘든, 애달픈 일을 겪은 이들은 사려 깊은 미소를 짓는 그의 옆에 서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 그의 앞에선 틀어막힌 입이 줄줄 터졌다. 그러다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쥔 채, 눈물을 쏟았다.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떠올라요. 멀리 외국으로 출장 간 아빠를 위해 이 노래를 불러주고 싶어요.사랑하는 남편이 생전에 그리 좋아했던 노래인데, 제가 대신.. 차마 사연을 끝맺지 못하고 흐느끼는 그네들에게 다가가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주고 보듬는 그의 모습에 우리는 감격했다. 짠해서 이를 어쩔꼬, 객석에서 티비 앞에서 너도나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반대로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일처럼 잘하셨오, 그동안 수고 많았소! 기운을 북돋아주는가 하면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막춤을 추었다. 그렇게 <전국노래자랑>은 각지에 숨은 재주를 내보이는 동네 장기자랑이 아닌, 생면부지의 민초들이 쏟아져 나와 쌓인 한과 희로애락을 한바탕 펼치고는, 모두가 껄껄 웃다가 금세 미친 것들처럼 펑펑 울어재끼는 '현대판 마당놀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요절복통 축제판에서 '송해'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중추이자 빠지면 안 되는 핵심이었다. 그가 없는 <전국노래자랑>을 상상해 보라. <전국노래자랑>이 없는 일요일 오후를 떠올려 보라. 한약방에 감초가 빠진 것처럼, 단팥빵에 앙꼬가 빈 것처럼 허전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 시간에 어떤 티비 프로를 택해야 할지 고심할 것이다. 일요일 오후를 덮치는 졸음과 식곤증에서 헤어날 길이 없으리라. 어쩌면 한주 간 쌓인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어낼 길이 없어 도처에 부부 싸움과 난투극 같은 불상사가 줄지었을지도 모른다.
영원한 국민 MC '송해', 그는 한국인들이 <전국노래자랑>이라는 한 마당에서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한데 아울러 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주었다. 소외된 변두리에 숨겨진 흥과 끼를 이끌어내 중앙 무대에 선보이고, 켜켜이 쌓인 우리네 울분과 한을 풀어내고 다독였다. 그는 6.25 전쟁 발발로 황해도 재령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 두었음에도, 장성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음에도 자신의 그늘을 내비치지 않으려 평생 노력했다. 힘겨운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들이 포복절도하면서 배꼽을 잡을 수 있게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망가지고, 능수능란한 입심을 선보였다. 꾹꾹 눌러 참고 참다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북받칠 때는 한껏 눈물을 쏟을 수 있게 그의 품을 내주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쪼록 저 세상에서는 이승의 한으로 남은, 생이별한 어머니와 누이동생 그리고 먼저 떠나보낸 아들을 만나 못다 한 이야기꽃 피우며 편안한 시간 누리셨으면 합니다. 송해 선생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