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친동생 생일이다. 아까 축하한다고 전화를 하니 고맙다고 거칠한 목소리로 답한다. 얼마 전까지 오미크론에 걸려 고생을 했다. 조카 '준'이 이제 기침을 안 한다고, 무사히 회복하여 오늘은 유치원에 잘 갔다고 기뻐한다. 후유증이 오래간다고, 당분간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다.
잠시 누워 천장을 바라보니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온다. 노랫가락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
첫 소절을 듣는 것만으로 여러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 집에 놀러 가 수도 없이 돌려 보던 그 영화. 홍콩 누아르의 대표작.
동생의 복수를 마친 피투성이 세 남자가 소파에 널브러져 앉아 있다. 주윤발이 중앙에 앉았던가? 아닌가. 그는 담배를 물고 있었을까?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릿하다.
익숙한 가삿말. 서투른 광둥어지만 워낙 알려진 노래라 자연스레 입 밖으로 흐른다. 이 노래가 왜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올까? 클래식 채널인데 누가 신청한 걸까? 추억의 노래 소환인가. 누구였더라? 이 노래를 부른 이가 아마도..
순간 허밍으로 따라 부르던 입을 다물었다. 친동생의 생일은 매년 4월 1일. 만우절이다. 가끔 동생에게 태어난 게 거짓말 아니냐며 놀리곤 했었지. 하지만 이 날은 누군가의 기일이기도 해. 그는 바로..
난 그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곤 그렇구나 하고 두 눈을 감았다. 멈추었던 노래를 다시 불렀다. 이번엔 어눌한 발음으로 가사까지 따라 불렀다. 장국영이 부른 <당년정>. 라디오 채널은 다행히 그의 노래를 중도에 끊지 않았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19년이 흘렀다. 난 그동안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잠시의 애도와 아쉬운 마음만을 품었을 뿐이다. 자잘하게 흩어진 그 마음을 그러모아 뒤늦게 짧은 조문弔文을 올린다.
당신이 남긴 영화 속 이미지가 떠올라요.
공중전화 부스에서 형의 품에 안겨 갓 태어난 딸아이의 이름을 불러주곤 숨을 다하는 당신은 절절해요.
전신 거울을 마주 보고 리듬에 맞추어 맘보 댄스를 추는 당신은 후줄근한 난닝구마저 순백의 턱시도로 보이게 하는 아우라를 지녔지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장검을 번득이며, 황혼의 바다를 가르고 가파른 절벽을 썰어내는 당신은 귀기가 솟구쳐요.
어쩌면 비운의 연인 우희 역을 맡은 당신은 숨은 정체성을 드러냈는지도 몰라요. 패왕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한 남자의 떨리는 눈빛은 당신의 마지막을 예감하게 했지요.
당신은 여전히 젊고 창창한 시절에 머물러 있군요. 백사장을 거닐며 당신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보면 때로는 부러운 마음이 들어요.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기력이 쇠하고 있어요.
그토록 사랑하던 도시, 홍콩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어요. 거리에서 종종 마주치는 그 시절 배우들은 더 이상 당신과 같지 않아요.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생기를 잃은 대부분의 이들. 총기마저 잃었는지 시대의 변화에 과거를 잊고 변절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흘러간 전성기의 추억에 의지하여 무대 밖에서 중후함을 간직하는 이들도 많답니다. 그중에 명이 다한 몇몇은 당신 곁에 머물러 담소를 나누며 밤을 지새울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저 낮은 지상으로 몸을 던진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어요.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당신뿐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제 홍콩은 자신만의 색채를 잃었어요. 당신이 떠나면서 전 세계를 호령하던 홍콩의 영화는 서서히 숨이 멎었어요. 당신은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나요?
오랜만에 당신의 노래를 들어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당년정>. 오직 한 번의 재회로는 부족해요.
유튜브로 당신의 지난 노래를 모두 귀에 담아요. 귀가 닳도록 밤새도록 들어도, 그리움을 달래기에 턱없이 모자랄 듯싶지만 '두 번'까지 듣기로 해요. 더 이상 듣다가는, 무한 재생을 했다가는 사무치는 회한에 가슴이 복받쳐 올라 당신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니까요.
내년은 당신이 떠난 지 20주기라 해요. 당신은 돌아올 수 없겠지만, 부디 우리가 기억하는 홍콩이 일부라도 돌아왔으면 해요. 대륙에 자리 잡은 중국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자부심. 침사추이와 네이선 로드를 가득 메운 자유분방함과 들끓는 열기. 그때 그 시절 우리를 극장 앞에 줄지어 서게 했던 각양각색의 영화들, 4대 천왕으로 대표되던 수많은 가수 겸 명배우들. 지난한 역사를 지탱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뒤를 이어 그 명맥을 유지했으면 해요. 당신도 저 세상에서 그렇게 바랄 거라 의심치 않아요.
당신이 남긴 모든 것들이 있어 우리는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거 같아요. 그래서 더 아쉬워요. 당신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면 홍콩의 많은 것들이 바뀌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았으리라는 그런 아쉬움. 나아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었을지 모른다는 헛된 미련 때문에..
하지만 이제는 당신의 부재를 받아들이려 해요. 부디 저 하늘에서는 편안히 잠들기를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