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어제 들렀어야 할 곳을 오늘 다시 들렀다. 전날은 오후 늦은 시간에 찾았더니 일주문에서 발을 들이지 말라고 제지한다. 오픈 시간을 훌쩍 넘겼다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한다. 뭐, 어쩔 수 있나. 발품을 다시 파는 수밖에..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귀한 사찰은 중생의 발길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법이다.
전북 부안군의 대표 사찰 '내소사'를 다시 찾았다. 평일이라 주차장은 공터나 다름없다. 일주문 가까이 차를 대려다 그 앞에 한식당 주인들이 차 빼라, 거듭 연락할까 봐.. 불시에 들이닥친 주차 단속에 걸릴까 봐 안전하게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 양옆으로 식당과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어느 간이 상점에서 부안군의 명물, 오디 주스를 한 잔 사서 시원하게 마시면서 걸어간다. 부안은 예부터 뽕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뽕나무 열매인 오디는 안토시아닌이 풍부하기 때문에 눈을 밝게 하고, 당뇨와 간 해독에 좋단다. 가는 길에 내소식당, 느티나무 식당 등 이름난 한식당들이 눈에 띈다.
일주문 안에 들어서니 웬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온다. 아이들이 귀여워! 하고 쓰다듬으려 하니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손길을 허락하는 게 아닌가. 길냥이들은 대부분 경계하거나 꽁무니를 빼기 일쑤인데, 이 녀석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게 흔히 일컬어, '영험한 고양이의 간택'이라는 '냥택'의 현장이란 말인가. 냥이를 자세히 뜯어보니 털이 짧고 진한 회색을 띠고 있다. 얼핏 보면 옅은 푸른색이 도는, 일반 길냥이와 달리 고급 묘종일 듯하다.
페르시안 블루? 아니 러시안 블루였던가? 노트북 화면에 비치던 어느 냥이의 고고한 자태가 이 녀석과 빼닮았다. 내소사 초입에서 만난 냥이는 배를 드러내 벌러덩 눕기도 하고, 쪼그려 앉은 아이들 무르팍에 부비부비도 하면서 친근함을 표시한다. 아이들이 한참을 쓰담쓰담하다가 엄마, 아빠.. 얘 집에 데려가면 안 될까? 하고 묻는데.. 지나치던 어느 중년의 여자가 냥이를 보더니 다가온다. 그녀는 아이들 품에 안겨있던 냥이를 빼앗듯 데려오더니 매만지고 엉덩이를 토닥토닥한다. 그러고는 냅다 껴안으려 하는 게 아닌가. 순둥해 보이던 냥이는 캬아옹! 새된 울음을 뱉으며 발버둥 치더니 근처의 수풀 너머로 잽싸게 도망갔다. 아이들과 냥이의 스킨십을 방해하고 끝내 녀석을 쫓아버린 그 여자는 멋쩍은 듯, 냥이가 사라진 저편을 바라보다가 천왕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아이들과 교감하는 러시안 블루 냥이.. 내소사 초입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우리를 간택한 러시안 블루 냥이, 집으로 데려와 집사 노릇해볼까 했지만, 그 연은 여기까지였다
멋대로 끼어든 불청객 때문에 냥이와의 데이트를 망친 아이들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멋대로 껴안지 않았더라면 우리 집에 데려올 수 있었으리라고, 원망하면서 헛된 기대를 품었다. 난 내소사 아니면 근처 식당에서 품어 기르는 냥이가 틀림없다며, 자신의 보금자리를 바꾸진 않을 거라고 넌지시 말했다. 단지 너희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아이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싶어 다가온 거라고 덧붙였다. 만약에 수풀로 숨어들었던 그 녀석이 다시 한번 너희들에게 다가온다면, 재차 냥택을 당한다면.. 그때는 우리 집으로 납치해서라도 어떻게든 데려오자고 설득했다.
수풀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살피던 아이들은 그제야 마음을 돌려 전나무 숲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천재지변을 견디다 못해 모로 쓰러진 고목 위로 초록 이끼가 피어났다. 모난 돌 위에 붙어 목석처럼 굳어 버린 청개구리 한 마리, 눈에 띈다.
호젓한 전나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내소사 천왕문이 나타난다. 부릅뜬 눈으로 악귀를 내쫓는 사천왕을 지나면 거대한 느티나무가 가까이 보인다. 1000년 가까이 내소사를 수호한, 신묘한 당산나무라 한다. 마을 주민과 스님들은 일주문 앞의 당산나무는 할아버지, 천왕문 앞의 당산나무는 할머니라 칭송하며 매년 제를 올린다고 한다.
천왕문 앞의 할머니 당산나무.. 1000년이 넘는 수령을 지녔다고 한다.
봉래루 아래 기둥 사이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보전이 우뚝 서있다. 정좌하신 부처님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며, 천천히 둘러보고 가라며 은은한 미소로 반긴다. 일체의 금속이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로만 지은 건물이라 그 짜임새가 일체의 틈 없이, 탄탄하기 그지없다. 문창살에 가득 새긴 정교한 꽃문양이 막 피어난 것처럼, 아득한 향기를 내뿜는다. 불심이 깊지 않아도 이곳, 내소사에 들어서면 마음이 정화되고 온갖 근심, 걱정이 저 멀리 연기처럼 사라진다. 내소사를 품은 '능가산'은 수목에 휩싸인 회색 암벽을 드러내며 든든한 배경이자 수호신으로 뒤를 지키고 있다.
대웅보전 앞을 지키는 봉래루. 모난 반석 위에 올려진 나무 기둥이 듬직하다.
다소 지친 아이들이 대웅보전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천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문창 살의 꽃문양
아이들과 내소사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해가 저물 무렵, 다시 일주문으로 돌아갔다. 아까 제 발로 다가와 냥냥하고 고귀한 자태를 뽐내던, 러시안 블루 냥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까 기대했지만.. 녀석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은 못내 아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냥이를 유난히 아끼고 애정하는 아이들을 위해, 내소사에 머무는 어느 귀한 보살님이 현현하여 우리 앞에 야옹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게 아닐까 싶어.. 난 뒤돌아 천왕문을 향해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디선가 냐아~옹! 하는, 숨은 냥이의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허나 어디서도 러시안 블루, 그 녀석의 기척을 찾을 수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