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맞닿은 죽음을 바라보는 거장의 시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_<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

by 라미루이

* 이 글은 <룸 넥스트 도어>의 스포를 담고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후계로 추앙받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그는 <룸 넥스트 도어>의 시나리오를 틸다 스윈튼에게 보내면서 '잉그리드'역으로 어느 여배우를 떠올리는지 물었다고 한다. 틸다 스윈튼과 알모도바르 감독은 거의 동시에 이메일로 한 배우의 이름을 지목했다. 바로 '줄리안 무어'. 이렇게 알모도바르 감독의 세계에 두 여배우가 초대되는 역사가 이루어졌다. 그의 첫 영어 장편 영화이자 틸다 스윈튼 & 줄리안 무어의 첫 공동 출연작이란다. 최근작 <룸 넥스트 도어>는 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 사자상'을 수상했다.





촉망받는 작가 잉그리드는 소설을 통해 죽음을 비정상적이라 규정하고, 초연히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밝힌다.

말기 암 투병 중인 오랜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병실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재회한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는 마사는 잉그리드에게 딸 미셸의 출생에 얽힌 비밀, 종군 기자로 전장에 뛰어들면서 벌어진 에피소드 등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 마사는 존엄한 죽음을 자신이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면서 잉그리드에게 비밀스러운 제안을 하는데..


한적한 교외의 별장에서 마사가 죽음을 준비하는 동안, 잉그리드가 같은 공간, 아래층에 머물러 달라는 조심스러운 제안. 잠시의 고민 끝에 잉그리드가 승낙하자 영화는 근사한 별장으로 무대를 옮긴다.

갈수록 파리하고 수척해지는 마사.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어두운 낯빛의 잉그리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과거를 돌아보는 화자와 사려 깊이 경청하고 리액션하는 청자가 다양한 시점의 투 샷으로 포착된다.





감각적이고 다채로운 미술 소품을 활용하는 알모도바르 감독답게 스크린에 배치되는 여러 사진, 그림들이 의미심장하다. 두 배우가 대화를 나누는 소파 위로 히잡을 쓴 여인들이 팔짱을 끼고 행진하는 사진이 걸리고, 별장에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진열된다. 이들 작품들은 감독의 의도를 넌지시 에두르기도 하고, 마지막 마사의 최후 장면을 예시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전작에서 보여줬던, 원색적이면서 마술적인 컬러 감각을 진일보시켜 마사와 잉그리드의 의상과 주변 소품, 배경들의 색감을 조화롭게 매치하거나 보색 계열로 대비시켰다.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와 존 휴스턴 감독의 <죽은 사람들, The Dead>의 스산한 설경이 연이어 재생된다. 폭소와 간극 없이 맞닿은 우울함의 이질감, 아이러니..

며칠 후 잉그리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마사는 자신이 몸소 염습을 하는 것처럼 노란 수의를 입고 립스틱을 바른 후에 최후를 맞이한다.


예고한 대로 마사의 방문이 닫혀 있음을 발견한 잉그리드. 서로의 공간을 나누는 방문의 개폐는 마사의 생사를 알리는 신호이자 암시였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도 산 자의 일상은 지속된다. 잉그리드는 존엄사, 안락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형사에게 공격적인 심문을 받는다. 동거인의 자살에 동조, 방임했다는 혐의로 살인자 취급받는 냉혹한 현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몰이해에 그녀는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인장이 드러나는 장면들



마사의 딸 미셸(틸다 스윈튼, 1인 2역)이 모습을 드러낼 때, 관객들은 마사가 환생, 부활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잉그리드는 담담한 표정으로 언제나 그랬듯.. 마사의 최후, 미셸의 아버지에 대한 비밀과 같은 어렴풋한 사실을 전한다. 영화 초반 플래시백 신, 불타 스러지는 목조 주택으로 뛰어드는 사내의 뒷모습이 잔상으로 남는다.


다행히 우호적인 태도로, 별다른 의심 없이 밖으로 나와 베드체어에 눕는 미셸. 옆에 나란히 누운 잉그리드는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들을 읊는다.


수차례 인용되고 호출되는 시적인 주문대로, 잉그리드의 목소리를 따라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진다.

망자와 산 자가 한 육신에 현현하여 누운 지상은 평온하기만 하다. 엄혹한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의지하고 있다.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고, 체온이 전해지는 한 그들은 살아갈 희망을 놓치지 않으리라.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마사의 최후








* <룸 넥스트 도어> 예고편 영상>>

https://youtu.be/Mk5HDOgLopA?si=6vOPQ8N8i19vbOG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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