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출연 <하얼빈>을 보고..
* 이 글은 <하얼빈>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갈래갈래 금이 갈 정도로 얼어붙은 강 위를 어느 왜소한 인간이 홀로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이름 '안중근(현빈)'. 대한 독립군 중장으로 함북 경흥에서 일본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만, 몇몇 포로들을 만국공법에 의해 예우하고 풀어준 것이 화근이 되어 소중한 동지들을 잃었다.
그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참회하는 심정으로 두만강 위를 걷고 있다. 길을 잃고 방황한 끝에 생을 포기하려 했지만 아직 자신이 할 일이 남았다는 사명감에 광복군 본거지가 있는 연추로 향한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독립투사 안중근의 실패, 낙담으로부터 시작한다. 장대한 빙판 위를 걷는 자신은 보잘것없는 인간일 뿐이며, 전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하는 인간적인 면은 참혹한 응징, 죽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얼마 후 하얼빈에 도착하는 교활한 늙은 늑대,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처단하려는 자신의 결심을 천명하고, 신념을 확신시키기 위해 자신의 왼손 약지를 자르고 태극기에 혈서를 쓴다.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을 뿐, 그 과정에 숨은 수많은 이들의 헌신, 희생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남산의 부장들>, <내부자들>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으로 향하는 도중에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의 도움, 첩보를 통해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본군의 시시각각 좁혀지는 포위망, 혹시나 존재했을지 모르는 배신자의 존재를 부각해 긴박하고 음울한 첩보물 스타일로 <하얼빈>을 제작했다.
밀정의 밀고로 인해 접선지의 정보가 노출되면서,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한 안중근은 결국 홀로 하얼빈 역에 도착한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담배를 피우던 동지들은 그를 사선으로 보내기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 독립군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 '최재형' 선생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토로하는 장면은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최소한의 빛이 투영되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외세의 무자비한 탄압에 두려움을 느끼고, 홀로 남은 괴로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할 법도 하건만.. 그는 동지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자신의 피를 바치기로 한다.
영화 말미에 안중근은 밀정이 누구인지를 알아채지만 그를 처단하지 않기로 한다.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용맹하고 숭고한 이들이지만, 결국은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는 한낱 미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가능한 인간적 용서의 행위다. 그는 이전의 관용으로 수많은 이들을 잃었지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 독립 이후의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배신한 이들이 언젠가 참회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리라는 굳은 신념이 있었기에, 독립 쟁취를 위해 한민족의 단합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그는 배신자를 풀어준다.
안중근 의사가 유유히 행진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은 하늘에서 내려보는 부감 숏으로 진행된다. 독립운동을 하다 숨을 거둔, 한 맺힌 열사들이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고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거사는 성공했고, 늑대 무리의 수장은 척결되었다. 그들은 안중근 의사의 "카레아 우라!"라는 외침을 듣고 피맺힌 한을 풀 수 있었을까?
긴박감 넘치는 스토리임에도 시종일관 영화는 느리게 침울하게, 비장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감독과 홍경표 촬영 감독은 독립군과 안중근의 악전고투를 보여주기 위해 '아리 알렉사 65' 카메라 1대를 동원해 느린 템포로 그들의 뒤를 쫓는다. 광활한 프레이밍의 자연을 헤매고, 상대의 숨통을 끊으려 발버둥 치는 이들을 조용히 포착한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독립군의 무장 항쟁에 불을 붙였다. 끝이 아닌 시작을 알리는 총성. 태평양 전쟁, 원폭 투하로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36년이 소요된 지난한 독립 투쟁의 역사. 역사의 일방적 흐름을 거스르고 어떻게든 되돌리기 위해 벌인 사투는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얼어붙은 빙판 아래 강물은 세차게 흘렀고 결국 고착된 상황을 전복하고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하늘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에, 그들이 흘린 피가 태극기에 스며들어 있기에.. 우리는 독립국의 지위를 누리는 자유 인간으로 지금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얼빈>을 통해 우리는 그 사실을 명심하고 그들의 뜻을 되새기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