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의 눈빛과 뺄셈의 미학
배우 박정민의 눈빛
때로는 눈빛 하나가 수많은 장면들을 압도한다. 영화 <휴민트>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조인성의 액션도, 신세경의 매력도 아니었다. 선화(신세경)와 박건(박정민)이 만나는 신에서 배우 박정민이 보여주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은 투박하고도 진솔하다. 연기를 위해 자아내는 눈빛이 아니었다.
박건(박정민)이 채선화(신세경)를 아리랑 식당에서 처음 조우했을 때, 그리고 남몰래 채선화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식당 뒷골목에서 서성였을 때, 마침내 선화를 다시 만났을 때 터져 나왔던 그 눈빛.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렸고, 갖은 고생을 다해 찾아다녔고, 결국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붙잡고 싶은데, 그냥 그녀의 손을 붙들고 어디든 떠나버리고 싶은데, 차마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는 남자가 어쩔 수 없이 짓게 되는 눈빛....
영화는 박건과 선화의 과거에 대해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 국가 보위성 조장인 박건이 원칙을 고수하느라 선화에게 어떤 상처를 입혔는지, 선화가 어떻게 박건을 떠나 여성으로서 모멸스럽고 위험한 삶(북한 식당 종업원이지만, 손님에게 성접대까지 해야 하는 삶)까지 흘러왔는지, 박건이 어떻게 선화를 찾아다녔고 결국 찾아냈는지는 박건과 선화가 아리랑 식당 뒷골목에서 만나는 장면 이후부터 조금씩 알려줄 뿐이다. 그렇기에 박건과 선화가 처음 마주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두 사람이 그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헤어진 연인이었나 보구나.'라고만 느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정민이 보여준 박건의 눈빛은 박건과 선화의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이야기들과 감정들을 모조리 느끼게 해 주었다. 그렇다. 여러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대사로 설명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박건을 연기하는 박정민의 강렬한 눈빛으로부터 자욱하고도 먹먹하게 밀려오는 감정으로 그냥 느낄 수 있었다. 박건의 고뇌를, 죄책감을, 후회를, 선화를 향한 그리움을, 애달프고 서럽고 한스럽고, 미치도록 다시 만나고 싶었고, 결국 만났는데, 붙잡고 싶은데, 차마 붙잡지 못하는, 박건이라는 남자의 내면에 몰아치는, 그 지독한 통증을. 박정민의 눈빛을 보면서 류승완 감독이 박건과 선화의 과거 회상신을 영화에 굳이 넣지 않았음이 고마웠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어두운 뒷골목, 비루한 조명 아래에서 고통스럽게 선화를 바라보는 박건의 시선만으로 충분했다.
뺄셈의 미학
<휴민트>는 감독 류승완이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이야기에서 군더더기를 말끔히 걷어낸 영화이다. 그의 장기인 액션씬도 영화의 도입과 후반부에만 집중했을 뿐, 중간에는 모두 걷어내었고 전작에서 자주 선보였던 개그 코드도 지웠다. 대신 영화는 희생된 정보원에 대한 죄책감으로 다른 희생을 막고자 하는 조 과장(조인성)의 고뇌와,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했던 후회로, 다시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은 박건(박정민)의 분노를 차분히 쌓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회한과 분노, 다시는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단들이 결말부의 액션신들을 통해 폭발한다. 조 과장과 박건의 처절한 몸놀림이 단순히 멋진 액션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이 영화의 빌런인 '황치성'으로 박해준을 선택한 것은 탁월했다. 러시아 마피아 두목인 알렉세이(로베르트 마서)가 막강한 육체적인 능력으로 조 과장과 박건의 액션을 최대한도로 끌어냈다면, 황치성(박해준)은 박건과 조 과장의 모든 감정선을 끌어내는 빌런으로서 탁월했다. 황치성(박해준)의 능글능글하면서도 섬뜩하고, 설렁설렁하면서도 노련하게 일처리를 해 나가는 최종 보스의 면모는 박해준이 연기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정석적이고 우직한 이야기
<휴민트>는 첩보 액션 영화 중 가장 정석적인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죄책감에 젖은 남자 둘이 거대 조직의 손에서 한 여성을 구출하는 이야기. 류승완의 전작 <베를린>이나 <모가디슈>에서도 반복되었던, 아니, 수많은 액션 영화들이 반복했던 뻔한 이야기. 그래서 영화가 올드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재와 이야기를 뒤틀어서 그저 피곤한 자극들로 가득 채운 콘텐츠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휴민트>처럼 묵직한 순애보를 바탕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를 위해, 구하고 싶은 여자를 위해 몸을 던져 희생하는 남자들의 우직한 이야기가 오히려 좋았다. 그 영화의 핵심 축이 되는 박건과 선화의 사랑을, 구구절절한 스토리가 아니라 박정민의 눈빛만으로 '느끼게'했다는 점에서, 그 눈빛을 볼 수 있었다는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