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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적 Oct 01. 2024

TV, 유리재털이, 눈이 따갑던 한숨

누군가 나는 아버지 얘기를 많이 한다고 했었지


어두운 밤입니다. 아니 점점 더 어두워질 것 같은 밤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대부분 어두운 거실에서 춤을 추는 TV 화면 앞에 멍하니 앉아 계신-딱히 집중하고 계신 것 같지 않은 눈빛으로- 모습이었습니다. 간혹 리모컨을 찾아 전원을 끄면 저주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눈을 뜨고 보고 있었다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12시가 지나면 신데렐라처럼 모든 방송은 마차를 타고 TV만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AFKN으로 채널을 돌려 가장 작은 소리로 거실을 밝혀놓았습니다.      

영어를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불빛을 움직이는 요정의 날갯짓처럼 바라다보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막다른 골목길의 가로등 같다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고 소파에서 일어나는 아버지는 운동장에 친구들을 두고 집으로 끌려가는 소년 같기도 하였습니다. TV를 끄면 운동장 불빛은 사라져도 친구들의 목소리는 더 크고 신나게 들렸을 테니까      


술을 드시지 못하는 아버지는 친구가 없었으며 줄창 담배를 피웠습니다. 아버지가 제게 요구하는 것은 재떨이를 가져오라는 일이 전부였으며 아버지가 담뱃갑을 손에 쥐면 얼른 뛰어가 재떨이를 가져다드렸습니다. 크리스탈은 아니었고 유리로 된 재떨이는 무거웠습니다. 오래전 영화에서 그런 재떨이로 머리를 후려치는 것을 보고 집에 있던 흉기를 떠올렸습니다. 담배를 잠시 멈출 때 담배가 쉴 수 있도록 작은 홈이 파여있었습니다.      


얼마 전 본가에 갔을 때 늦은 밤 밖으로 나가려는 저를 붙잡고 그냥 베란다에서 피우라며 꺼내주신 재떨이를 보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리던 그 재떨이를 만났습니다. 아버지보다 수명이 길던. 아버지보다 더 단단하고 투명해서 속이 훤히 보이던 그것을.     


어머니에게 그 재떨이가 맞는지 물으려다 모서리 한쪽 이가 빠진 곳을 손으로 쓰다듬자 가끔 재떨이 안쪽에 휴지를 깔고 손끝으로 물을 떨어뜨리면 그 모서리에 닿아 찢어지던 휴지 조각이 떠 올랐습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 재떨이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잠들어 있는 혹은 잠들기 시작하느라 침대의 모서리를 부분을 따라 걷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고 거실 불빛이 방안을 마름모꼴로 재단되었다가 다시 사라진 뒤 방문이 닫히곤 하였습니다. 엄마 방-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방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에 있던 그 사내의 방문을 열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잠든 이후에 잠이 들고 깨기 전에 이미 무언갈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직 어떤 조명을 켤지 망설이는 밤입니다.

아버지만큼 잠이 줄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만큼 걱정이 늘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처럼 눈앞에서 반짝이는 요정의 날갯짓 같은 불빛을 바라다보며 무언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미 회사 가기 너무 싫은 남자가 밤부터 투정을 부립니다. 아무도 힘내라고 말해주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엉덩이를 다독여주지 않는 밤중에 앙탈을 부립니다.      

내일 아침 혼잣말로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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