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구반대편에서 돌아온.

죽거나, 미치거나, 평온하거나.

by 적적

그해의 연휴는 유난히 길었다. 오래 묵은 비가 그친 뒤처럼 공기 속에는 묘한 정적이 깔려 있었고, 도시의 리듬은 잠시 멈춰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멈춤을 견뎠다. 어떤 이들은 여행 가방을 끌며 공항으로 향했고, 또 어떤 이들은 집 안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휴식과 피로가 뒤섞인 채, 하루의 길이는 느리게 늘어졌다.


건물의 외벽을 따라 햇빛이 기어오르는 시간, 좁은 골목의 카페에는 출근 대신 커피를 고르러 온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 가지 표정이 섞여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미묘한 불안. 손에 든 종이컵의 온도를 확인하는 짧은 동작에도 그 불안은 스며 있었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사실 기다림의 대상은 없었다.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일과가 된 듯, 그들은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한산했다. 그러나 적막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 도심 외곽으로 향하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었다. 기차역 대합실에는 종이 도시락 냄새와 휘발유 냄새가 섞였고, 누군가는 그 속에서 오래된 연애의 냄새를 떠올렸다. 창문 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은 모든 이에게 다른 속도로 지나갔다. 같은 시속 100km라도 어떤 이에게는 탈출이고, 어떤 이에게는 귀향이었다.



연휴는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 시간을 소비했고, 누군가는 그 시간을 견뎠다. 도심에 남은 사람들은 불이 꺼진 사무실 창을 바라보며 이상한 평온을 느꼈다.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보다도, 일할 곳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더 컸다. 그들의 하루는 퇴근 없는 낮으로 가득 찼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침묵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의 반복이, 오히려 그들을 묘하게 진정시켰다.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은 평소보다 두 배의 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임금의 무게는 가볍게 느껴졌다. 카운터 앞에 서는 사람들의 표정이 모두 비슷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잠시 들른 사람, 여행을 가지 못한 사람, 아무 데도 가지 않은 사람. 그들은 같은 빛깔의 피로를 얼굴에 걸치고 있었다. 플라스틱 컵의 얼음이 녹는 속도만이 각자의 시간을 구분해 주었다. 어느 쪽이 더 느리게 녹느냐가 그들의 하루를 정의했다.



밤이 되면 도시의 불빛이 느리게 번졌다. 평소보다 정적이 짙은 이유는 모두가 잠시 ‘멈춤’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방 안의 먼지, 오래된 냉장고의 소음, 무심히 쌓인 신문,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자신. 어떤 이들은 그 조용한 현실이 두려워 텔레비전을 켰다. 그러나 화면 속의 웃음소리는 현실의 정적을 더 또렷하게 했다. 정적은 피할수록 선명해졌고, 웃음은 들릴수록 공허했다.



휴식은 언제나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쉬는 동안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더 또렷이 본다. 평소에는 일과 소음 속에 묻혀 보이지 않던 균열들이 고요 속에서 드러난다. 긴 연휴는 그 균열을 직시하게 만드는 잔혹한 거울이었다. 누군가는 그 거울을 마주하다가 이별을 결심했고, 누군가는 묵혀두었던 전화를 걸었다. 어떤 감정들은 바쁘지 않을 때만 자라난다. 멈춤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속도로 살아왔는지를 깨달았다.



시골로 향한 사람들은 반대로 도시의 불빛을 잊고 싶어 했다.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진 차량의 행렬은 기묘한 의식을 닮아 있었다. 모두가 동시에 ‘벗어남’을 시도했지만, 도착지의 공기는 비슷했다. 시골의 밤도 조용했고, 휴대전화의 화면은 여전히 손바닥 위에서 빛났다. 달라진 건 주변의 소음뿐이었다. 그들은 도시를 떠났지만, 도시의 습관은 여전히 그들의 손끝에서 꺼지지 않았다.


연휴의 중반쯤 되자, 시간은 늘어진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은 ‘아직 이틀이나 남았다’고 말하며 안도했지만, 그 말속에는 벌써 끝을 준비하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사람은 언제나 끝을 의식하며 쉰다. 그 끝이 있어야 쉼은 의미를 갖는다. 무기한의 휴식은 곧 불안이었다. 휴식의 끝을 상상하는 순간, 사람은 다시 삶의 질서를 떠올린다. 휴식은 결국 일상을 위한 연습이 아니라, 일상의 부재를 견디는 훈련에 가까웠다.



어떤 사람들은 연휴 동안 집을 대청소했다. 오래된 물건들을 버리며, 자신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떠올렸다. 버려진 물건들 속에는 지난해의 자신이 묻어 있었다. 낡은 컵, 쓰지 않는 향수, 깨진 액자 속 사진. 그들은 그것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으며, ‘정리’라는 이름의 의식을 수행했다. 그러나 정리된 것은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버린 물건의 무게만큼, 어쩌면 그들은 자신을 조금씩 비워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연휴 내내 잠을 잤다. 낮에도 커튼을 닫고,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속으로 침잠했다. 그 잠 속에서는 꿈조차 흐릿했다.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긴 연휴의 피로는 쉬는 데서 오는 피로였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감정들은 차례로 탈색되었다.



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 도시는 다시 빛을 되찾았다. 정체된 고속도로 위에서 사람들은 라디오를 켜고, 그 안의 뉴스 앵커가 말하는 ‘내일부터 평상시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목소리에는 위안과 체념이 동시에 있었다. 돌아간다는 건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자신에게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편의점 진열대에는 피로회복제가 줄을 섰고, 카페의 테이블 위에는 ‘내일부터 다이어트’라는 말이 흘렀다. 사람들은 다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들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계획을 세움으로써 현실을 회복했다. 연휴가 끝나면 삶은 다시 ‘해야 할 일’로 구성된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다시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 신호의 반대편에는 여전히 쉬지 못한 감정이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 긴 연휴는 고생이었다. 가족과 함께 머물러야 했고, 웃어야 했으며, 계획되지 않은 침묵과 대화를 견뎌야 했다. 웃음 뒤에는 피로가, 대화 뒤에는 공허가 남았다. 반면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평온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았고, 세상은 잠시 자신을 잊은 듯 조용했다. 그들은 그 고요 속에서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평온과 고생은 서로를 닮은 그림자였다.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다른 한쪽은 존재하지 않았다.



길고 느린 시간이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흐르지는 않는다. 고생과 평온은 종이 한 장처럼 맞닿아 있었다. 고생은 타인 속에서, 평온은 고독 속에서 태어났다. 결국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긴 연휴를 견뎠다. 피로하게 쉬거나, 평온하게 지쳤다. 시간은 그 모든 감정들을 공평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모두는 다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출근길 버스 안에서, 서로의 눈빛 속에 비슷한 그림자가 비쳤다. 누군가는 여전히 휴식의 여운을 품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다음 연휴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얼굴에는 한 가지 공통된 흔적이 있었다. 너무 오래 쉰 사람들의, 혹은 충분히 쉬지 못한 사람들의, 어딘가 불완전한 표정.


긴 연휴는 결국 사람들을 제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그러나 돌아온 자리는 이전과 같지 않았다. 시간은 언제나 미세하게 변화를 남긴다. 멈추어 있었던 도시는 다시 움직였고, 멈춰 있었던 마음은 여전히 무언가를 붙잡지 못한 채 흔들렸다. 사람은 멈춤을 통해 움직임을 배우고, 움직임을 통해 다시 멈춤을 갈망한다.

돌아왔지만, 문득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떠나기 전의 자리에는.



이미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는 것을.



사진 출처> pinterest







keyword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9화존재는 자유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