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삭제된 말들의 밤.

by 적적

무엇을 지웠는지 말하지 않는 사람들


말은 늘 가장 약한 형태로 도착한다.

누군가의 입술을 빠져나오는 순간, 이미 절반은 증발한 채로.

“그냥 그렇다고.”

그 문장은 설명을 거부한다.



이유도, 배경도, 원인도 없이 문장 끝에 붙은 마침표 하나만 덜컥 남겨둔다.

그 마침표는 닫힘이 아니라, 봉인에 가깝다. 열 수는 있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처럼.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말이 나오기 전, 이미 세계는 몇 번이나 뒤집혔고, 몇 개의 표정이

교체되었으며, 몇 차례 숨이 얕아졌다.

그냥.

그렇다.

고.

문장은 분해되며 다른 온도를 띤다.

‘그냥’은 회피처럼 들리고,

‘그렇다’는 체념처럼 보이며,

‘고’는 어딘가로 이어지려다 잘린 접속사처럼 덜컹거린다.

말은 잘려나간 부분에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


결핍이야말로 가장 선명한 윤곽선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는 순간, 감정이 타인의 소유가 될까 두려워서.

그래서 대신 말한다.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은 방패이자 흔적이다.



표면에는 아무것도 묻어 있지 않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다.

닦아낸 자국.

지워낸 자국.

지우려다 더 번진 자국.

그냥 그렇다고.

말이 반복될수록 의미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두께를 얻는다.



겹겹이 쌓인 얇은 막처럼, 투명하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는 막.

어떤 밤에는 그 말이 침대 옆에 놓인다.

전등을 끄면, 방 안에 가장 늦게 남아 있는 것은 가구도, 공기도 아니라 그 말이다.

“그냥 그렇다고.”

빛을 잃고도 또렷하다.

설명은 언제나 배신을 동반한다.



사실을 나열하는 동안, 핵심은 빠져나간다.

사람들은 사건을 말하지만, 정작 사건을 만들었던 미세한 흔들림은 말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손목에 닿았던 미묘한 체온.

혹은, 아무 의미 없이 건넨 농담에 아주 잠깐 멈칫하던 눈동자.

그 순간은 기록되지 않는다.

대신 남는 것은 문장 하나.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은 증언이 아니라 삭제 기록이다.

무엇을 지웠는지 밝히지 않는 기록.

삭제된 파일은 목록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저장 장치 어딘가에는 여전히 흔적이 남아 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비어 있다고 말할수록, 실제로는 더 많은 것이 숨겨져 있다.

“왜?”라는 질문은 늘 너무 늦게 도착한다.

이미 닫힌 문을 두드리며,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다.

문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다.

그냥 그렇다고.



그 문장은 질문을 튕겨낸다.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냥 그렇다고.

두 번 말하면, 세 번째는 묻지 않게 된다.

사람은 설명을 듣지 못하면 상상을 시작한다.

상상은 대개 더 잔혹하다.

그래서 그 말은 친절한 잔혹.



상상을 허용하되, 확인은 주지 않는.

말이 적을수록, 표정이 많아진다.

눈꺼풀의 속도, 입술의 떨림, 어깨의 기울기.

문장은 침묵 속에서 해체되고, 대신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을 하는 동안, 목소리는 조금 낮아진다.

그 낮아진 음역대에는 실패한 기대와 아직 남아 있는 미련이 동시에 섞여 있다.

그러나 말 자체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문장을 둘로 나누면, 그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든다.

설명하지 못한 감정이, 스스로 증식한다.



어쩌면 그 말은 방어가 아니라 보호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보호하는 방법은 감정을 축소하는 것.

“힘들어.” 대신 “그냥.”

그리고 결국,

“그냥 그렇다고.”

이 문장은 모든 극단을 중화한다.



슬픔도, 분노도, 기대도.

극단이 제거된 자리에는 잔여물만 남는다.

그러나 잔여물은 사라지지 않는다.

탁자 위에 남은 물자국처럼, 마른 뒤에도 둥근 윤곽을 유지한다.

그냥 그렇다고.



말은 흔적처럼 남는다.

이 문장은 종종 이별의 예행연습이 된다.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한 발은 뒤로 물러난 상태.

마음은 닫히지 않았으나, 더 이상 열리지도 않는 상태.

그냥 그렇다고.



여기에는 변명도 없다.

책임도 없다.

서사도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수정할 장면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면, 고칠 수도 없다.

그냥 그렇다고.



말은 반복되고, 반복될수록 단단해진다.

마치 굳어가는 콘크리트처럼.

처음에는 물처럼 흘렀지만, 어느 순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 대신 시간을 보낸다.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농담을 반복한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균열이 진행 중이다.

균열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단지, 어느 날 갑자기 금이 간 유리처럼 드러날 뿐.

그 순간에도 말은 비슷하다.

그냥 그렇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지만 유리는 이미 금이 가 있고, 빛은 그 틈을 따라 굴절된다.

빛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사실만이 조용히 남는다.

문장은 닫힌다.

그러나 의미는 닫히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라는 말은 문장 끝에서 멈추지만, 듣는 이의 내부에서는 계속해서 증식한다.

왜?

언제부터?

정말로?

질문은 끝없이 생겨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냥 그렇다고.

이 말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 지나간 자리다.



폭풍이 휩쓸고 간 뒤의 모래사장처럼, 겉보기에는 고요하지만

발을 디디면 아직 젖어 있는 상태.

그런 밤에는 그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하루가 끝난 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은 설명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공기 중에 얇은 막처럼 떠 있다.

손으로 휘저으면 흩어질 것 같지만, 실은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그냥 그렇다고.



그 말은 결론이 아니다.

판결도 아니다.

해답도 아니다.

그것은 상태다.

잠시 멈춰 선 온도.

더 이상 뜨겁지도, 완전히 식지도 않은 온도.

문장은 닫혀 있다.

그러나 내부는 아직 굳지 않았다.

그냥.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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