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으로 스며드는 것들

표면 아래에서 조용히 젖어가는 관계

by 적적


겨울비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다. 아니, 낸다. 그런데 듣는 쪽이 먼저 포기한다. 귀가 아니라 어깨로 듣는 소리. 떨어진다기보다, 어딘가에서 오래 웅크리고 있던 숨이 풀린다. 한 번에 나오지 못한 것들이 가늘게 흩어진다.


건물 외벽을 타고 흐르는 물은 선이 아니다. 얼룩이다. 닦으려다 포기한 자리처럼 번진다. 창틀 모서리에는 먼지가 불어 있다. 검은 가루가 물을 만나면 갑자기 몸집을 키운다. 작은 늪 같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단단하다. 겨울비는 넓은 도로보다 이런 데를 먼저 적신다. 아무도 자세히 보지 않는 곳. 페인트가 아주 조금 들뜬 자리. 문고리 안쪽, 손때가 얇게 겹친 부분.



여름비는 우산을 때려서 사람을 몰아세운다. 겨울비는 사람을 멈춘다. 멈추게 해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이미 바뀌었는데도 한 박자 늦게 걷게 만든다. 신발 밑창이 젖은 아스팔트에 붙는다. 떨어질 때, ‘짝’ 하는 소리. 작다. 그런데 이상하게 또렷하다. 그 미묘한 저항 때문에 하루가 약간 느려진다. 달릴 이유가 사라진다. 대신 어제의 얼굴이 떠오른다. 왜 그런지 설명은 안 된다.



창문 유리에 맺힌 물방울은 생각보다 탁하다. 투명하지 않다. 안쪽 먼지를 끌어안고 내려오면서 길을 만든다. 길은 곧지 않다. 중간에 멈춘다. 옆으로 샌다. 이미 흘러내린 자국을 덧밟다가 갑자기 방향을 튼다. 물이 아니라 망설임이 흐르는 것 같다.



어떤 문장도 그렇다. 입 안에서 한 번 굴러다니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사라진다. 해야 할 말이 있었는데. 막상 마주 앉으면 컵받침의 얼룩만 보게 된다. 왜 저 모양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지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공기가 있다. 그 공기가 젖는 순간이 있다. 대화가 끝났는데도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시간. 계산은 이미 끝났는데 카드를 지갑에 넣지 못하고 잠시 들고 있는 손. 그 몇 초 사이에 무게가 달라진다. 갓 벗은 장갑 안쪽은 축축하다. 체온이 빠져나가고 남은 물기. 감정은 이미 지나갔는데, 자리는 아직 젖어 있다. 설명은 안 붙는다. 그냥, 그렇다.



관계가 무너질 때 큰 소리가 날 거라고 믿는다. 유리창이 깨지거나 문이 세게 닫히거나. 그런데 실제로는 소파 스프링이 아주 조금 내려앉는 정도다. 앉았다 일어났을 뿐인데 복원이 늦다. 눈으로는 잘 모른다. 대신 몸이 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걸. 사랑도 비슷하다. 뜨겁던 밤보다, 그다음 날 아침 식은 커피를 마실 때의 침묵이 더 정확하다. 커피 표면에 얇은 막이 생겨 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채.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군 채 서 있다. 가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떨어질 듯 말 듯 버틴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릴 뿐이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떨어지지 못한 것들은 점점 무거워진다. 말하지 않은 문장도 그렇다. 쌓인다. 모양을 바꾼다. 표정은 같은데 눈동자의 속도가 달라진다. 질문을 들은 뒤 아주 짧게 멈추는 그 틈. 처음엔 1초. 나중엔 2초.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 있다.



입술까지 올라왔다가 삼켜진 말은 어디로 갈까. 겨울 구름은 낮게 깔려 있다. 회색인데, 가만 보면 노란 기가 돈다. 도시의 먼지를 먹은 색.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가, 그냥 지나간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 어깨가 거의 스칠 만큼 가까운데도 체온은 전달되지 않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굳이 뻗지 않는 거리. 애매하다. 그래서 오래간다.



비는 표면보다 틈을 좋아한다.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 간판 뒤쪽의 어둠. 현관문 아래 닳아버린 고무패킹. 그 가느다란 선으로 물이 들어온다. 바로 티가 나지 않는다. 벽지는 멀쩡해 보인다. 그런데 안쪽이 젖는다. 관계도 그렇다. 웃으며 넘긴 농담. “아니야”라고 너무 빨리 말해버린 표정.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 순간. 그때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안쪽이 눅눅해진다.



젖은 아스팔트 위의 신호등은 번진다. 빨강이 초록을 조금 삼키고, 초록이 빨강을 조금 밀어낸다. 경계가 흐리다. 분명한 색인데도 확신이 없다. 예전의 감정도 비슷하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렷하지도 않다. 불안이라고 부르기엔 약하고, 평온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젖어 있다.



손을 잡으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온도 차이를 먼저 느낀다. 한쪽은 차갑고, 다른 한쪽은 그 차가움을 데우려 한다. 젖은 장갑을 벗을 때처럼 살갗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사소한 끈적임. 별것 아닌 감각인데 하루 종일 남는다. 거대한 고백보다 이런 감각이 더 오래간다.



어떤 이별은 눈처럼 소리 없이 쌓이지 않는다. 대신 얼음처럼 얇게 깔린다. 보이지 않게. 아침에 계단을 내려가다 미끄러질 뻔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밤새 얼었구나. 어제와 같은 말투였는데 오늘은 조금 낯설다. 이유는 없다. 아니, 있는데 설명이 안 된다. 발밑이 미끄럽다. 그 정도.


비는 위에서 아래로만 떨어지지 않는다. 처마를 타고 돌아 엉뚱한 곳으로 튄다. 마음도 직선이 아니다. 지금 마주 앉은 얼굴을 보다가, 오래전 목소리가 불쑥 스민다. 잊었다고 생각한 냄새가 젖은 코트에서 올라온다. 겨울비는 현재만 적시지 않는다. 기억을 건드린다. 기억은 마른 적이 없다.



카페 창밖으로 우산들이 움직인다. 검은 우산, 투명한 우산, 살이 뒤틀린 우산. 우산은 완벽하지 않다. 가장자리로 물이 흘러내린다. 어깨가 젖는다. 사람도 그렇다. 단단해 보이는 얼굴에도 어딘가는 젖는다. 그 젖음 때문에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완전히 마른 사람은 이상하게 가볍다. 너무 가볍다.



비가 그쳐도 도시는 바로 마르지 않는다. 벤치는 차갑다. 계단은 미끄럽다. 웅덩이는 하늘을 붙잡고 있다. 다툼이 끝났다고 바로 가벼워지지 않는 것처럼.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지나간 말들이 겹쳐 쌓인 자리다. 눌러보면 푹 꺼질 것 같다.



겨울비는 새것을 만들지 않는다. 이미 있던 금을 드러낸다. 페인트 아래 숨어 있던 균열. 웃음 아래 숨어 있던 피로. 마른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 비가 와야 보인다. 괜히 불편해진다.



밤이 깊어지면 빗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창문을 닫아도 어딘가에서 얇은 진동이 남는다. 감정이라기보다, 감정이 지나간 뒤의 상태. 이름 붙이기 애매한 것. 그래도 분명히 있는 것.



아침이 와도 길은 완전히 마르지 않는다. 햇빛이 비추는 쪽은 먼저 마르고, 그늘은 늦는다. 관계도 그렇다. 겉은 괜찮아 보인다. 안쪽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로, 그러나 분명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겨울비가 내린다. 큰 소리 없이. 대신 오래 남는다. 말 대신 남은 공기. 웃음 뒤의 짧은 멈춤. 함께 걷던 길 위에 고인 얕은 물처럼.

그냥, 젖어 있는 상태로 머문다.



그리고 이런 비는,

대개

쉽게 그치지 않는다.

사진 출처> pinterest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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