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서 만나요.

관계는 간격이 아니라 꺾임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by 적적


무릎을 끌어안으면 몸은 작아진다.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된다. 허벅지가 벽처럼 단단해지고, 팔은 괜히 힘이 들어간다. 등을 둥글게 말면 안쪽이 어두워진다. 숨이 안으로 모인다. 이마를 무릎 가까이 내려오게 하면 생각이 식는다. 아니, 식는다기보다 멎는다. 밖에서 떠들던 말들이 안쪽에서는 힘을 못 쓴다.


그 좁은 틈. 피부와 피부가 거의 닿을 듯 멈춘 자리. 거기에 누군가 앉아 있다. 분명한 형체는 아닌데, 체온은 있다. 이름을 부르면 흩어질 것 같아 부르지 않는다. 대신 맥박처럼 느껴진다.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사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눈앞에 있어도 멀고, 보이지 않아도 가까울 때가 있다. 관계는 간격이 아니라 꺾임이다. 마음이 한번 접히면 안쪽이 드러난다. 괜히 아무 일 아닌 말에 예전의 흉터가 욱신거린다. 이미 다 나은 줄 알았던 자리에서 피가 도는 느낌. 친밀은 이해로 시작하지 않는다. 비슷한 방향으로 아파본 적이 있을 때, 그때 조심스럽게 열린다.



무릎을 껴안은 자세는 안전해 보이지만 실은 허술하다. 앞은 가렸지만 등은 텅 비어 있다. 보이지 않는 쪽은 늘 늦게 다친다. 관계도 그렇다. 정면에서 하는 말보다, 무심히 내어준 빈자리에서 더 크게 시작된다. 등을 맡긴다는 건 사실 거의 무방비에 가깝다. 그걸 알면서도 맡긴다. 이상하게도.


이마에는 하루가 남는다. 말하다 삼킨 문장, 괜히 날 선 표정, 설명하다 포기한 감정. 밤이 되면 그것들이 무게를 갖는다. 그걸 무릎 가까이 끌어내리면 생각이 상처 옆에 놓인다. 무릎은 오래된 관절이다. 자주 깨졌고, 자주 닳았다. 이마와 가까워지면 부끄러움도, 후회도 비슷한 높이가 된다. 그 사이에 앉은 너는 말이 없다. 대신 가만히 본다. 도망가지 않는다.



사람은 쉽게 작아진다. 단단하던 태도가 표정 하나에 흔들린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던 하루가 한 사람 때문에 기울어진다. 자꾸 떠오르면 이미 늦은 거다. 안쪽의 방은 이미 점령당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숨은 거짓말을 못 한다. 전화기 너머로 흘러오는 호흡, 대답 사이에 끼어 있는 짧은 정적. 거기서 다 들린다. 차가운 말은 정확하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대신 따뜻한 침묵은 설명이 없어도 오래 붙어 있다. 문제는 가까워질수록 숨이 가빠진다는 거다. 사랑은 산소 같고, 동시에 과호흡 같다. 붙잡으려다 숨이 막힌다.



사람은 타인의 손에서 자신의 경계를 배운다. 너무 세게 쥐면 멍이 들고, 너무 느슨하면 허기가 남는다. 적당함은 늘 늦게 도착한다. 몇 번은 틀리고, 몇 번은 돌아가야 몸이 안다. 그래서 관계에는 늘 약간의 서툼이 밴다. 사과가 늦거나, 설명이 과하거나, 침묵이 길어진다. 그렇게 조금씩 모양이 잡힌다. 완성은 없다. 오늘 괜찮았던 거리가 내일은 버거울 수 있다.



기억은 고약하다. 지나간 말이 나중에 다른 표정을 하고 나타난다. 웃고 넘긴 장면이 밤에 다시 재생된다. 그때는 몰랐던 표정이, 그제야 이해된다. 이해는 늘 늦다. 완전한 이해는 거의 오지 않는다. 대신 모르는 부분을 그냥 두는 법을 배운다. 끝까지 파헤치지 않는 태도. 관계는 그 느슨함 위에서 겨우 숨을 쉰다.



밤이 깊어지면 안쪽의 방은 더 또렷해진다. 낮에 붙들고 있던 역할이 벗겨지고, 감정의 잔해가 바닥에 쌓인다. 그 위에 앉은 너는 낮보다 솔직하다. 덜 웃고, 덜 꾸민 얼굴. 어둠은 사람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크게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밤에는 누군가의 무게가 더 분명하다.



닿은 순간보다 멈춘 순간이 오래간다. 건네려다 거둔 말, 거의 닿을 뻔한 손. 보내지 못한 문장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쓰인다. 완성되지 않은 장면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끝났는데도 끝난 것 같지 않다.



어떤 날에는 그 존재가 위로다. 몸을 둥글게 말면 세계가 한 사람 크기로 줄어든다. 그 정도면 버틸 만하다. 그러나 또 어떤 날에는 같은 존재가 무게가 된다. 밀어내려 할수록 안쪽으로 더 들어온다.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진다. 등을 펴도, 고개를 들어도 남아 있다.



그래도 다시 누군가를 들인다. 등을 내어주고, 빈자리를 만든다. 다칠 걸 알면서도. 타인을 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또렷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싸 안은 무릎과 이마 사이, 그 답답하고 좁은 틈은 두려움이 모이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솔직한 자리다.



이마를 무릎에 기대면 심장 소리가 가까워진다. 작지만 확실하다.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 안쪽에 앉아 있던 존재는 언젠가 체온을 바꿔 기억으로 옮겨간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 이전의 온도가 기준이 된다.



감싸 안은 무릎과 이마 사이의 너는 한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었고, 미련이었고, 어떤 날은 후회였고, 또 어떤 날은 조용한 감사였다. 몸은 다시 펴진다. 무릎은 풀리고, 이마는 들린다.

안쪽의 방은 완전히 비지 않는다. 관계는 끝나는 대신 거칠게 형태를 바꾼다. 그리고.


누군가의 체온으로 이어진다.

사진 출처> pinterest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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