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틈에서 시작되는 아주 느린 증식
어떤 상상은 문을 두드리지 않아요. 이미 열려 있는 틈으로 들어오죠. 바람이 창틀을 넘는 방식이랑 좀 비슷해요. 처음에는 그게 바람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커튼이 아주 조금 흔들리고, 책장 위 먼지가 아주 미세하게 방향을 바꾸는 정도의 사건일 뿐이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미세한 흔들림 속에 어떤 게 자리를 잡아요. 상상은 늘 그렇게 시작되더라고요. 이미 열려 있는 곳에서요.
생각해 보면 사람 몸에는 틈이 꽤 많죠. 귀 뒤의 부드러운 살이라든지, 쇄골 사이에 잠깐 생기는 얕은 그늘 같은 것들요. 밤이 되면 눈동자 안에 습기가 조금 더 깊어지는 순간도 있고요. 상상은 그런 데서 번식해요.
식물 뿌리처럼 조용히 퍼지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공간을 조금씩 넓혀가요.
어떤 몸은 상상에 딱 맞는 온도를 가지고 있기도 해요. 따뜻하지만 뜨겁진 않고, 차갑지만 식어버린 건 아닌 온도요. 신기한 건 손을 대지 않아도 그걸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냥 가까이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기압 같은 게 있어요.
설명은 잘 안 되는데, 분명히 있어요.
그 기압 아래에서 상상이 증식하죠.
그 증식이 세포 분열처럼 정확한 건 아니에요. 박테리아처럼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번지는 얼룩에 가까워요. 어느 순간 보면 조금 더 넓어져 있고, 또 어느 순간 보면 전혀 다른 모양이 되어 있죠.
가끔 상상은 대상보다 먼저 존재하기도 해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요.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피부가 먼저 반응하는 순간이 있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귀가 그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밤도 있고요.
상상은 그런 기다림 속에서 자라요.
어떤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어떤 장면은 슬쩍 지워버리기도 해요. 기억의 편집자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편집자보다는 작가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현실이 제공하지 않은 세부를 계속 채워 넣거든요.
예를 들어 이런 거죠.
창문을 열고 들어온 바람이 어떤 냄새였는지.
누군가가 돌아서기 직전에 눈꺼풀이 얼마나 느리게 내려왔는지.
그런 것들이요.
사실 그런 장면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상상은 그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죠.
사람 몸 안에는 작은 온실 같은 공간이 하나쯤 있는 것 같아요. 햇빛이 직접 들어오는 건 아닌데, 유리 너머의 밝음이 은근히 머무는 곳요. 상상은 그 안에서 자라요.
조금 과장된 색을 띠고요. 실제보다 윤기 나는 잎을 만들죠.
가끔 상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현실이 놓쳐버린 질감을 꽤 정확하게 복원해 내거든요. 가령, 누군가의 웃음이 끝난 뒤 남는 공기의 모양 같은 것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기인데, 상상 속에서는 꽤 또렷한 형태를 가져요.
얇은 유리컵처럼 투명하고요. 살짝 기울어져 있는 모양이죠.
상상이 증식한다는 건 단순히 많아진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상상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는 의미에 더 가까워요. 하나의 장면이 다른 장면을 불러오고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을 흉내 내죠.
빛을 떠올리다 보면 갑자기 냄새가 생기기도 해요. 냄새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피부의 온도가 바뀌기도 하고요. 감각들이 서로의 경계를 슬쩍 넘나들어요.
작은 공모 같은 걸 시작하죠.
그 공모 속에서 상상은 더 빠르게 번식해요.
어떤 날에는 상상이 너무 많아져서 현실이 살짝 뒤로 밀려나요. 방 안의 사물들이 조금 멀어 보이고요. 손에 쥔 컵의 무게가 실제보다 가볍게 느껴지기도 하죠.
그때 사람은 좀 이상한 상태에 들어가요.
현실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완전히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상상이 더 활발하게 움직이죠. 작은 생물처럼 틈을 찾아다녀요.
누군가의 몸이 열려 있다는 건 단순히 마음을 허락했다는 의미만은 아닐지도 몰라요. 감각이 조금 느슨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어요.
빛이 들어오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고요. 냄새가 조금 더 오래 머물고요. 손끝의 감각이 평소보다 오래 남는 상태요.
그 상태에서 상상은 아주 빠르게 자라요.
어떤 경우에는 현실보다 먼저 결론에 도달하기도 하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경험한 것처럼 만들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래서 상상은 종종 사랑이랑 비슷해져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예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닌데 이미 몸 안에서 형태를 가지기 시작한 감정이죠.
그 감정은 꽤 섬세해요. 작은 말 한마디에도 방향이 바뀌고요. 아주 사소한 표정 하나에도 색이 달라져요.
그런데 또 끈질기기도 해요. 한 번 자리 잡으면 쉽게 사라지지 않죠.
열려 있는 몸 안에서 상상은 조용히 증식해요.
처음에는 그냥 하나의 장면이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장면이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기 시작해요. 그 연결이 또 다른 연결을 만들고요.
그러다 보면 작은 상상 하나가 어느새 하나의 세계처럼 보이기 시작해요.
그 세계는 완전히 닫혀 있지 않아요. 어딘가가 항상 조금 열려 있거든요.
그래서 상상은 멈추지 않죠.
누군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는 기억.
창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는 사실.
말하지 않은 문장이 공기 속에서 잠깐 머물렀다는 느낌.
그 작은 것들이 계속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요.
어느 순간, 그게 상상인지 기억인지 잘 구분이 안 되죠.
어쩌면 상상은 실제로 증식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이미 존재하던 것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일 수도 있죠. 아니면 전혀 다른 방식일 수도 있고요.
어떤 밤에는 이런 느낌도 들어요. 상상이 아니라 몸 자체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요. 그 넓어진 공간 어딘가에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장면들이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거죠.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요.
그냥... 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