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오역

따뜻함으로 읽히지 않는 빛에 대하여

by 적적


초봄은 대개 망설임의 계절이라고들 말하죠.

그해 공기는 망설이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손이라기보다는, 좀 얇은 칼날 같은 거였죠. 햇빛은 분명 있었는데요, 피부에 닿는 순간 뭔가 잘못 전달된 소식처럼 어긋나 있었어요. 원래 빛은 따뜻함의 번역본이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날의 빛은, 원문을 배반하고 도착한 오역 같았죠.


바람은요,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사람들 옷깃 안으로 파고들었어요.

침입이라는 말로는 좀 부족할 만큼 집요했죠. 꽃봉오리도 분명 부풀어 있었는데요, 그게 기대라기보다는 압박에 가까워 보였어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풍선처럼요.



계절은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더 많은 긴장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름은 분명 봄인데, 아직 호출되지 않은 계절의 그림자 같은 상태였죠.



신호등은 평소처럼 바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은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추위를 계산하고 있었죠. 누군가는 손을 주머니 깊이 넣고 있었고, 누군가는 어깨를 잔뜩 올리고 있었고요, 또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걸음을 재촉했어요.



그 ‘아무렇지 않음’이라는 게요, 대개 연기의 한 종류잖아요. 숨을 내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입김이 공기 속에 퍼졌고요, 그 보이지 않음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남았죠.



어떤 감각은요, 보이지 않을 때 더 확실해지기도 하죠.

이를테면 불편함이라든지, 불안이라든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같은 것들이요. 초봄의 한기는 그런 감정의 원형처럼 작동했어요. 형태를 갖기 전인데도, 이미 충분히 존재하고 있는 상태였죠. 햇빛은 오후가 되면서 길게 늘어졌는데요, 그 길이가 온도를 설득하지는 못했어요.



길어진 그림자는 따뜻함의 증거라기보다, 그냥 시간이 쌓였다는 표시였죠. 시간이 쌓인다고 해서 꼭 온기가 따라오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날의 시간은 좀 차갑게 축적되고 있었어요.


나무들은요, 잎을 내기 직전의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어요.

그게 결심 같아 보이긴 했는데요, 결심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죠. 원래 결심이라는 건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이 나무들은 계속 행동 이전에 머물러 있었어요. 멈춰 있는 것 같지만, 아마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아주 조금씩은 움직이고 있었겠죠.


성장이라는 단어는 보통 결과를 가리키죠. 그런데 과정은 거의 감지되지 않아요. 초봄의 나무는요, 그 감지되지 않는 과정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장치 같았어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에, 사실은 거의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죠. 다만 그게 체온으로 환산되지는 않았을 뿐이에요. 체온으로 환산되지 않는 변화는요, 쉽게 무시되죠. 그렇다고 사라지는 건 아닌데도요.



사람들 대화도 좀 짧아졌어요.

입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니까요, 문장이 중간에 끊기더라고요.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멈췄어요. 그런데 그 멈춤이 어색하다기보다는, 일종의 합의처럼 보였죠.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묵시적인 동의요. 다만 그 동의는 친밀함 때문이 아니라, 외부 조건 때문이었어요. 추위라는 조건이요.



추위는요, 관계의 형태를 바꿔버리기도 하잖아요. 가까이 서게 만들거나, 아니면 각자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만들거나요. 그해 초봄은 확실히 후자였어요.



사람들은 서로에게 다가가기보다는요, 자기 체온을 지키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었어요. 체온을 지킨다는 건 결국 자신을 지킨다는 말이랑 크게 다르지 않죠. 보호라는 건 언제나 경계의 다른 이름이니까요.



창문을 열면 바깥공기가 바로 들어왔어요.

실내의 온기는 금방 흩어졌고요. 온기라는 게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더라고요. 유지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계속 보충되고 있는 거잖아요. 창문을 닫으면 다시 따뜻해질 수 있었죠. 그런데 그 ‘닫는 행위’ 자체가 좀 패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바깥을 거부해서 얻는 안온함은요, 그 안온함이라는 단어를 조금씩 훼손하는 것 같았거든요.



선택이라는 건 늘 무언가를 포기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니까요. 그날의 선택은 유난히 또렷했는데, 이상하게 더 모호하게 남았어요.



햇빛 아래서 사람들은 코트를 벗을까 말까 망설였어요. 벗으면 추울 것 같고요, 입고 있으면 계절에 뒤처진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요. 그런데 그 ‘보일 것 같음’이라는 건요, 사실 누구에게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죠. 타인의 시선이라는 게, 종종 과장된 가설로 존재하잖아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가설에 맞춰서 행동을 조정해요. 초봄의 한기는 그 조정 기준을 좀 흐려놓았어요. 뭘 입고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그 기준이 애매해졌죠.



기준이 흐려지면 자유로워질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아요.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은 더 어려워지거든요. 그 어려움은 피로로 번역되고요, 피로는 다시 무감각으로 이어지죠. 무감각은 또 편안함이랑 쉽게 헷갈리고요.



소리는 분명 봄의 것이었어요. 그런데 공기는 아직 겨울의 문법을 따르고 있었죠. 서로 다른 문법이 한 문장 안에서 부딪히면요, 의미가 완전히 깨지지는 않아요. 대신 좀 어긋난 채로 유지되죠. 그 어긋남이 바로 그날의 공기였어요.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고,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닌 상태요.



확정되지 않은 의미는 오래 남아요. 확정된 건 금방 소비되는데, 유보된 건 잘 사라지지 않거든요. 초봄의 한기는 그 유보의 감각을 몸에 새겨놓았던 것 같아요. 따뜻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아니라고 말하는 몸이요. 몸은 가끔 머리보다 더 정직하니까요.



저녁이 되니까 기온은 더 내려갔어요. 낮 동안의 희미한 기대는 거의 다 사라졌고요. 그런데 그게 상실이라기보다는, 정정에 가까웠어요. 잘못된 예측이 수정되는 느낌이니까요. 예측이라는 건 늘 과거 데이터에 기대잖아요. 그런데 계절은 가끔 그 데이터를 배신해요. 배신이라는 말이 좀 감정적이긴 한데요, 그날은 거의 물리적인 현상처럼 느껴졌어요. 그냥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았거든요.



밤공기는 낮보다 더 정직했어요.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안쪽이 차가워졌고요, 그 차가움이 몸의 내부를 직접 느끼게 했죠. 내부를 느낀다는 건 결국 경계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잖아요. 어디까지가 바깥이고, 어디서부터가 안쪽인지요. 그 경계는 분명한데도, 언제든 흔들릴 수 있어요. 감각은 그 흔들림을 계속 기록하고 있었고요.



그렇게 추운 봄이었어요. 그런데 이 문장은요, 설명이라기보다는 인식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미 지나간 걸 붙잡으려는 시도 같기도 하고요, 아직 끝나지 않은 걸 미리 규정하려는 충동 같기도 하고요. 추위는 분명 있었죠. 그런데 그게 전부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따뜻해질 가능성은 계속 남아 있었고요, 결국은 실현됐을 거예요. 어떤 순간은 과장되게 남고요, 어떤 순간은 거의 지워지죠. 확대된 추위는 하나의 계절처럼 기억되고요, 지워진 온기는 배경으로 밀려나요. 그런데 그 배경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요.



그 봄은요, 아직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 어디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요, 분명히 존재하는 위치가 있는 것 같아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가도, 막상 보면 조금 더 멀리 있는 거리요. 공기가 약간 차가워지는 순간마다, 이유 없이 옷깃을 여미게 되는 저녁마다, 그때의 온도가 미묘하게 다시 올라와요. 이걸 되살아난다고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어쩌면요,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던 걸지도 몰라요. 사라지지 않은 건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그냥 계속, 다른 형태로, 다른 강도로, 같은 자리에 머무는 거죠. 그 자리는 계절이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고요. 상태는요, 이름보다 오래 남거든요.


그냥....그렇다고.....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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