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갖지 못한 감정이 시선을 빌려 사는 밤
어떤 떨림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유리잔이 동시에 깨질 준비를 한다.
비 오는 날의 우산들처럼. 어둠이 거리를 가득 채운 순간,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는데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이름이 불렸던 기억이 늦게 도착한다. 소리는 이미 끝났고, 귀는 여전히 열려 있다. 도착하지 못한 목소리들이 길목에서 서성인다.
한때는 계단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파도처럼 보인다. 발걸음이 오르내릴 때마다, 건물 전체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쉰다. 숨이 멎는다는 말은 언제나 조금 과장되어 있었지만,
과장이 없었다면 어떤 문장도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손잡이들이 동시에 흔들린다. 그것은 움직임이라기보다 동의에 가깝다. 철제 고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미세한 각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서로 다른 음악을 듣고 있다. 다른 언어로 같은 장면을 기억한다. 다른 계절에 같은 이별을 겪는다.
누군가 커피를 쏟았고, 카페 전체가 조용해졌다. 침묵은 물처럼 번진다. 컵 받침, 신발 끈, 휴대폰 화면, 심지어 계산대의 영수증까지 잠시 젖어 있다. 어떤 떨림은 이렇게 사물의 표면을 빌려서만 존재한다. 몸을 갖지 못한 감정이 의자 다리의 균형을 살짝 무너뜨린다. 그 의자는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질 것 같은 상태로 오래 머문다. 머무름은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다.
멈추지 않은 움직임, 끝나지 않은 신호. 초록불이 켜졌는데 아무도 건너지 않는 횡단보도처럼. 어떤 사람은 그 장면을 보며 갑자기 떠나고 싶어진다. 이유는 나중에 만들어진다. 떠남이 먼저 존재하고, 설명은 뒤늦게 따라온다.
바람이 창문 틈을 통과할 때, 집 안의 모든 커튼이 동시에 몸을 뒤척인다. 잠든 것처럼 보였던 방들이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한다. 침대는 파도, 책장은 방파제, 전등은 멀리서 깜빡이는 등대. 누군가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순간 멀리 있는 개가 짖는다. 어린 시절의 골목이 갑자기 떠오른다. 연결되지 않을 것들이 서로의 이름을 빌려 쓰기 시작한다. 이름이 바뀌면 운명도 잠시 방향을 잃는다.
그래서 밤마다 전봇대들이 조금씩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침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줄을 맞춘다. 정확함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다. 우리는 먼저 흔들리고, 그다음에 이해한다. 어떤 이해는 너무 늦어서 이해가 아니라 풍경이 된다. 이미 지나간 열차의 바람처럼, 설명할 수 없는 체온처럼. 도시의 모든.
엘리베이터가 같은 속도로 상승하는 날이 있다. 아무도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하지만 건물들은 서로를 향해 아주 조금 기울어진다. 유통기한이 지난 빵이 부풀어 오르는 밤. 냉장고 속에서 잠들어 있던 과일들이 동시에 익는다. 달콤함은 종종 시간과 약속을 어긴다.
그렇게 어긋난 순간들 속에서 사람들은.
이유 없이 웃거나
이유 없이 울거나
완성된 문장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은 감정은 계속해서 주변을 두드린다. 벽을. 창문을. 기억을. 어떤 기억은 실제보다 더 크게 떨린다.
그래서 과거는 종종 현재보다 선명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학교 운동장에서 동시에 날아오른 먼지들이 같은 모양을 만든 적이 있다. 그날 이후 아무도 공을 제대로 차지 못했다. 발끝이 타이밍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타이밍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실패는 그것의 그림자 위에 놓인다. 누군가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면 다른 누군가의 슬픔이 음정을 맞춘다. 음정은 위로가 아니라 협상에 가깝다. 비가 멎었는데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방울이 아니라 습관이 떨어진다. 습관은 소리 없이 젖는다. 젖은 것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말하지 않아도 같은 방향으로 눕는다. 밤이 깊어지면 건물 외벽의 균열들이 은밀하게 대화를 나눈다. 어느 틈이 더 오래 버텼는지, 어느 쪽이 먼저 무너질지. 무너짐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조용히 진행되는 합의. 그래서 어떤 새벽에는 도시 전체가 아주 미세하게 다른 리듬으로 숨 쉰다. 알아차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알아차린 사람은 다시 잠들지 못한다. 잠들지 못한 눈은 사물들의 떨림을 기록한다. 기록은 결국 또 다른 떨림이 된다.
창문에 맺힌 물방울들이 동시에 아래로 미끄러질 때 시간은 잠시 방향을 바꾼다. 과거가 앞서가고 미래가 뒤따른다. 누군가 그 장면을 보고 사랑을 믿게 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떠나야 한다는 확신을 얻는다. 확신은 종종 잘못된 타이밍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유 없이 켜진 가로등. 이유 없이 늦어진 발걸음. 이유 없이 같은 꿈을 꾸는 낯선 사람들. 도시는 설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서로 닿아 있다. 닿아 있음은 증명되지 않는다. 증명되지 않는 것들이 더 강하게 흔든다. 어느 순간부터.
모든 문장들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마침표는 찍혔지만 의미는 계속해서 번진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유리잔 하나가 아주 작게 떨리고 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아직.
아직.
아직. 그 떨림은 멈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조용히 증폭되고 있다.
사진 출처>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