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온도

비슷한 것들을 만지다 보면 결국 자신의 숨이 달라진다

by 적적


한 남자가 같은 크기의 스티로폼 상자를 들어 올렸다 내려놓는다.

손목의 각도는 거의 변하지 않는데 상자마다 미묘하게 다른 무게가 손바닥의 온도를 바꾼다. 같은 모양의 흰 표면은 햇빛을 비슷하게 반사하지만, 그 반사광 속에는 보이지 않는 사소한 균열이 숨겨져 있다. 그는 상자를 고르지 않는다. 상자들이 그를 통과해 지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상자 속 딸기들은 고만고만하다. 그러나 고만고만하다는 말은 가장 잔인한 분류법이다. 완전히 익은 붉음도 아니고 아직 덜 익은 초록도 아닌 색의 사이, 과육의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섞인 경계에서, 열매들은 서로를 닮아가며 서로를 밀어낸다. 손끝이 닿는 순간 어떤 딸기는 숨을 참고 어떤 딸기는 조용히 짓무른다. 흰 스티로폼은 모든 반응을 흡수하는 침묵의 피부처럼 그 광경을 지켜본다.



상자를 들어 올릴 때마다 약간의 망설임을 끌어올린다. 내려놓을 때마다 판단의 그림자를 내려놓는다. 이 반복은 노동이라기보다 어떤 의식에 가깝다. 구분할 수 없는 차이를 구분하려는 시도, 이미 비슷해져 버린 것들 사이에서 마지막 남은 개별성을 찾아내려는 습관. 그러다 문득 상자의 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호흡이 들려온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다 멈춘 사람의 숨처럼 불완전하다.



비닐하우스 안은 늘 조금 늦게 아침이 온다. 공기 속에는 물방울과 당분이 뒤섞여 있고, 햇빛은 천장에 부딪혀 둔탁하게 부서진다. 그 빛 아래에서 딸기들은 점점 더 비슷해진다. 색의 농도는 시간이 아니라 기다림의 방식에 따라 변한다. 어떤 열매는 조용히 붉어지고, 어떤 열매는 붉어지는 척하다가 갑자기 멈춘다.



상자의 가장자리에는 늘 보이지 않는 기준선이 있다. 그 선을 넘은 열매는 선택되고, 선 아래에 머문 열매는 남겨진다. 남겨진다는 것은 단순히 제외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이유로 시간을 더 부여받는 상태다. 남겨진 것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서서히 향기를 잃는다. 그러나 향기를 잃는 동안 오히려 어떤 기억이 더 또렷해진다. 냄새가 사라질수록 존재의 윤곽은 더 선명해진다.



그는 가끔 딸기를 들어 올려 빛에 비춰본다. 과육 속에 미세하게 번진 어둠을 확인하려는 듯, 혹은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붉음을 찾으려는 듯. 그 순간 열매는 사물이 아니라 질문이 된다. 질문은 언제나 손에서 미끄러지기 쉽다. 떨어진 딸기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소리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크게 들린다.



스티로폼 상자들은 차곡차곡 쌓인다. 동일한 형태의 반복은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어딘가 불길하다. 완벽하게 정렬된 사물은 언제나 무너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질서를 믿으려 애쓰면서도, 한쪽 모서리가 살짝 들려 있는 상자를 자꾸만 눈으로 쫓는다. 결함은 늘 시선을 끌고, 시선은 결국 방향을 만든다.


딸기밭은 바깥에서 보면 단순한 풍경이다. 일정한 간격, 일정한 색, 일정한 계절. 그러나 가까이 들어오면 모든 것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 흙의 결이 다르고, 잎맥의 길이가 다르고, 익어가는 속도가 다르다. 이 미세한 차이들은 서로를 설명하지 못한 채 공존한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은 종종 더 오래 살아남는다.



그는 마지막 상자를 들어 올린다. 무게는 처음과 거의 같지만 손의 감각은 이미 달라져 있다. 무엇을 고른 것인지, 무엇을 놓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상자를 내려놓는 순간 작은 먼지가 공중에 떠오른다. 빛 속에서 그 먼지는 잠깐 반짝이다가 방향 없이 흩어진다.


딸기들의 붉음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흰 상자의 내부에서는 미세한 온기가 계속 움직인다. 선택된 것들과 남겨진 것들 사이에 특별한 경계는 없다. 다만 어떤 것들은 조금 더 오래 들려졌고, 어떤 것들은 아직 들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다음 상자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 동작은 시작도 끝도 아닌,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자세처럼 보인다.



비닐하우스의 아침은 늘 한 박자 늦게 열린다. 투명한 막 위로 맺힌 물방울들이 먼저 하루를 시작하고, 사람의 숨은 그 뒤를 따라온다. 딸기잎 사이로 손을 넣는 순간, 아직 이름 붙지 않은 문장 하나가 손목에 매달린다. 덜 익은 열매는 부드러운 저항으로 존재를 주장하고, 너무 익은 열매는 스스로 무게를 내려놓듯 손안에서 기울어진다. 수확은 선택의 기술이 아니라 망설임을 다루는 훈련에 가깝다.



줄기마다 다른 속도로 자라는 문단의 호흡과 닮아 있다. 어떤 열매는 햇빛을 충분히 받아 단맛을 밀어 올리고, 어떤 열매는 빛을 피해 그늘에서 조용히 색을 늦춘다. 한 문장은 오래 매달려야 향을 얻고, 또 다른 문장은 너무 오래 붙들면 물러진다. 가위로 줄기를 자르는 소리는 마침표가 놓이는 순간처럼 짧고 단호하다. 그 뒤에 남는 여백은 언제나 더 길다.



상자에 담긴 딸기들은 서로를 닮아가며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같은 자리에 놓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표면마다 다른 흠집과 다른 빛의 방향이 숨어 있다. 글쓰기도 그렇게 정렬된다. 원고지 위에 나란히 눕혀진 문장들은 질서를 이루지만, 그 질서 속에는 각기 다른 불안이 박혀 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단락은 종종 가장 먼저 무너질 준비를 한다.



해가 기울 무렵, 비닐하우스 안의 공기는 달콤한 피로로 가득 찬다.



남겨진 열매들은 내일을 향해 조금 더 익어가고, 이미 따낸 열매들은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판단을 기다린다. 하루의 끝에서 손에 남는 것은 붉은 물이 아니라 미묘한 감각이다. 무엇을 골랐는지보다 무엇을 아직 남겨두었는지가 더 또렷해지는 순간. 다음 문장을 향해 손을 뻗는 동작은 수확과 같다. 시작도 끝도 아닌 자리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색을 만지는 일.

사진 출처>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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