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s nothing that doesn't change here
여전히 종이와 우편으로 모든 공적 업무를 처리하는 독일에서는 세상이, 아니 사회가 내가 원하는 만큼 빠르게 변하지 않아 늘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한국에서 한 시간이면 되는 일을 독일에서는 몇 주를 기다려야 했으니 빨리빨리가 뼛속까지 배어있는 찐한 국인인 내가 독일의 슬로 라이프에 적응하는 건 다른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그곳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한국의 변화 속도는 말 그대로 LTE급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나는,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꼰대, 갑질, 상명하복, 접대 등으로 대표되는 기업 문화를 빨리 바꾸지 못하는 걸까 한탄하고 불평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돌아와 보니 정말 몇 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물론 여전히 개선해야 할 점들은 많지만, 고작 근 2-3년 동안 주 52시간 근무가 정착했고, 회식은 과거의 절반으로 줄었으며, 스타트업에서 시작된 직급 없애기를 몇몇 대기업에서도 시도하고 있고, 꽤나 많은 회사들이 기업의 수평적 문화를 위한 방법들을 시도하고 있다. 누군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회피한다'던데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인들은 정말 본능에 역행하며 사느라 부단히 애쓰는 엄청난 종족인 것 같다.
나는 사실 누구보다 안정감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편안함을 버리고, 낯선 무언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을 좋아했다. 좀 변태 같은가. 그 과정이 나를 성장하게 한다는 느낌이 들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나라들을 전전하며 정리된 커리어를 쌓는 것보다는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에 훨씬 더 집중했다. 그러나 고작 서른 중반밖에 되지 않아 요즘의 나는 변화가 조금씩 벅차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보면서 내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만큼 트렌디한가도 점검해보았는데, 자존심 상하는 이야기지만 난 어느덧 젊은 사람들보다는 ‘낀대(꼰대와 젊은이 사이의 어중간한 세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자꾸 불안감이 느껴진다. 내가 5년 뒤에도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AI가 성장하는 속도만큼 나는 발전을 하고 있는지. 영 자신이 없다.
이 회사에서 다행이라고 느낀 건 바로 이 변화 때문이다. 이곳은 내가 매년 한 살씩 더 먹어가는 나이와, 점점 더 줄어드는 에너지를 핑계로 편안함에 안주하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당연하다. 여기선 모든 것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회사의 예상 면접을 검색하면 아주 흔한 질문 중 하나로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에 대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변화에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혹은 ‘본인이 제어할 수 없는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나요' 등등. 솔직히 이 질문을 다른 회사에서도 참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굉장히 변화하고 싶어 하는 기업인 것처럼 포장했던 곳도 막상 입사하고 보면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변화하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편안하게 일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예컨대 전 직장은 그 산업에서 아주 오랜 시간 1등을 달리던 곳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1등 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어느덧 2등으로 밀려나기 일보직전의 상황이 되었다. 그제야 리더십은 조직 혁신을 외치며 수천만 원을 주고 외부 컨설팅을 받았지만, 직원 누구도 컨설턴트의 인터뷰에 솔직히 임하지 못했고 그들이 내놓은 해답에는 갖가지 변명을 붙여가며 반기를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결국 우리는 혁신은커녕 작은 변화에도 실패했다.
여기선 재조직(Reorganization)도 아주 빈번히 일어난다.(컨설팅도 필요가 없다.) 팀이 쪼개졌다가 합쳐지기도 하고, 보고 라인도 자주 바뀌며, 업무 목표도 필요시에 자주 조정된다. ‘저는 팀장님만 믿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조직에 뼈를 묻겠습니다!’라는 말은 완전한 농담이 되어 버린다. 팀장이 바뀔 수도 있고, 조직이 바뀔 수도 있으니 그런 충성심은 쓸모가 없다. 리더십은 끊임없이 우리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루션을 내놓으며 직원들은 설루션에 따라 빠르게 조직을 재정비하고 OKR을 세팅한 뒤 다시 그에 따라 성과를 내놓아야 한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플랫폼이나 소프트웨어도 계속 변한다. 그래서 사용을 하다 버리는 것은 있어도, 변하지 않는 건 많지 않다. 재빠르게 어떤 툴을 만들어, 내부 피드백을 받고, 그 피드백을 기반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방식을 주로 택한다.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식도 매번 같지 않다. ‘기존에 그렇게 했으니까’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기존에 그렇게 했다면 그것보다 더 나은 방향을 계속 고민해야 한다.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최선인지를 계속 물어야 한다. 새로운 일을 맡으며 이 일을 전임자가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어보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난 이렇게 했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시도해 보고 내게도 알려줄래? 그리고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조언을 구해도 좋아.'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고, 새로운 걸 기획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이 회사는 단연 최악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