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피지기 Jul 28. 2023

나르시시스트 헬리콥터 부모

90년대 헬리콥터 부모의 대처법


요즘 서이초 사건으로 갑질하는 학부모에 대한 비판이 들끓고 있다. 갑질 학부모들은 마치 교사를 자신의 아바타, 혹은 수족처럼 부리면서 자기 아이만 봐주기를 바란다.

교권이 약화되면서 이런 갑질 학부모들이 급격히 늘었다. 교권이 강했던 때에도 나르시시스트 부모들은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그 시절 이들은 뭘 하고 있었을까?


나르시시스트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강약약강'이다. 

이들은 모든 인간관계에는 서열이 있다고 생각하며, 대부분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갑인지 을인지를 무의식적으로 안다. 그래서 자신이 을이면 부당해도 참고 알아서 기며 대들지 않는다. 반대로 자신이 갑이거나 조금이라도 상대가 편하거나 만만하게 생각되면 본색을 드러내고 갑질을 해서 상대방을 서럽게 만든다. 상대가 서러워하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갑에게는 관대하고 을에게는 가차 없다.

교권이 강하던 시절에는 교사가 갑이었다. 교사에게 밉보이면 그 학생은 1년이 고달프다. 심지어 교사가 기분이 나쁘면 '내 기분상해죄'로 이유 없이 맞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따지는 학부모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때린 교사가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때 나르시시스트 부모의 반응은 아마 크게 두 가지였을 것이다. 무관심하거나 촌지를 갖다 바친다.

나르시시스트는 골든차일드 자녀에게는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스케이프 고트 자녀에게는 무관심하다. 그래서 아마 골든차일드 자녀의 담임에게는 촌지를 뿌리고 스케이프 고트 자녀의 담임에게는 무관심하게 대했을 수도 있다.


원조 헬리콥터 엄마였던 우리 엄마는 내 남동생과 나의 담임선생님 모두에게 촌지를 늘 바치셨다.

내 담임선생님께 촌지를 드렸다는 말은 못 들었으나 결정적으로 내가 고1 때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갑자기 부담임선생님이 나랑 다른 친구를 계단으로 불러내셨다. 그러더니 흰 봉투 한 장을 꺼내셨다.

봉투 안에 든 건 구두티켓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어떤 부모님이 자기한테 줬는데 이걸 돌려드리려고 하다 보니 누구 엄마인지 헷갈린다면서 나랑 다른 친구 한 명을 불러낸 것이다. 나 혼자 불려 갔으면 그나마 덜 부끄러웠을 것 같은데 같이 불려 간 친구가 있어서 어찌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도 나중에 나와 같은 교대에 입학했다.

나는 그때까지 엄마가 촌지를 뿌리고 다니시는지 몰랐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설마 고등학교 선생님들한테까지 그러시는 줄은 몰랐다.


나한테도 이 정도였는데 남동생 반에는 아마 더했을 것이다. 하필 동생은 입학하자마자 전교에서 악명 높은 선생님 반에 배정되었다. 역시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선생님이 지시봉을 던졌는데(보통은 분필을 집어던지는 경우가 많은데 초등학교 1학년한테 지시봉을 던지다니 역시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나 보다.) 관자놀이에 맞아서 퉁퉁 부어 왔다.

엄마가 촌지를 갖고 가자 그 선생님이 사실 동생을 맞히려던 건 아니었고 잘못 날아가서 그리 됐다며 사과 비슷하게 했고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엄마는 촌지의 효과를 더욱 신봉하게 되신 것 같다.

요즘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없지만 만약에 생겼다고 해도 학부모가 따지러 가지 이런 상황에 촌지를 가져가지는 않는다. 오늘날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는 약자의 포지션을 취하며 갑의 비위를 최대한 맞춰보려고 노력해서 의외로 갑질에 잘 버티는 성향이 있다. 아마도 서열관계에 익숙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게 부당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인지도 잘 모른다. 그들은 보통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보통 나처럼 9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교사에게 겪은 부당한 일들에 대해 성토하며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온갖 나쁜 교사 욕을 하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그런 그 나쁜 교사일수록 촌지 효과가 좋다.

촌지 때문인지 나는 90년대 학창 시절에 개인적으로 혼난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혼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소심한 성격 덕분에 늘 조용하고 얌전하게 지내긴 했다.

누구는 그 촌지를 못 내서 부당한 취급을 당했는데 촌지 덕분에 편하게 지낸 건 자랑이 아니고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나도 누구 앞에서 이 얘길 꺼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욕먹을 각오 하고 글로나마 어렵게 이 얘기를 꺼내본다.

이런 사람들이 교사가 요즘처럼 을이 되면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돌변한다. 나르시시스트한테 갑질을 안 당하려면 그 사람보다 갑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나르시시스트들이 활개 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에게 짓밟힌 교사의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어서 정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길 바란다.


슬픈 연주는 오늘까지만 올릴까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곡명: 독백 part1 김광민 작곡)






작가의 이전글 학군지 출신 교사가 학군지에서 근무해 보니...(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