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모, 모두의 이모
나에겐 이모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편이고 사주셨던 물건들은 시간이 오래지나서 버렸거나, 몇 개 남은 악세사리 같은 것 들은 낡은 보석함체로 장롱속에 박혀있을 것이다. 국민학생에서 초등학생으로 신분에 대한 명칭이 바뀌던 그 해 하와이로 이민을 가셨다. 당시에 브로커에게 금액을 지불하여 비자를 받는 방법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이모의 성이 바뀌고 여권이 발급되었다. 얼마의 금액이 오고갔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불법비자로 미국 입국으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국까지 놀러갈 형편이 아니었던 우리집 사정 상 미국응로 놀러간 적은 없다. 또한 그 분 사정상 한국에 자주 나오시지도 못했다. 기억하기로는 두 번 나오셨고 그 후에 유방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장례식도 엄마랑 큰 삼촌 두분이서 다녀오신 것을 끝으로 몇개의 유품을 남겨놓고 이 세상에서 이모는 사라졌다. (여담으로, 하와이의 아름다움은 고인을 잃은 슬픔을 뚤고 엄마의 기억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지미, 이모가 미국에서 만나 결혼한 남자, 즉 나의 이모부. 그 부부가 한국에 방문 했을때 나의 영어실력은 기본적 인사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미에 대한 기억도 없는데 딱 한번의 만남에서 기억나는 것은 온 가족이 모여 한국 음식점엘 갔는데 좌식 테이블이 놓여진 식당인지라 미국인 지미는 우리처럼 바닥에 앉을 수가 없었던 점이다. 의자위에 앉아서 허리를 굽혀 밥을 먹는 모습밖에 기억나질 않는다. 흔히 말하는 양반다리를 하지 못해 이모부 혼자 의자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이모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족들은 지미와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북한에서 '이모'는 어머니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남한에서 이모는 엄마의 자매를 제외한다면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부르는 말로 쓰이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모 여기 물 한병만 갖다주세요. 이모 여기 김치 좀.. '아줌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례한 느낌이 들고, 아주머니라는 단어 역시 아줌마의 연장선상의 개념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이모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일종의 '마이 브라더'라고 여겨지는 영어권의 개념 아닐까? 자주가는 식당 이모를 부를땐 내가 기억하는 나의 이모가 생각나지는 않는다. 나의 이모는 고유의 느낌과 스토리가 있지만 식당 (또는 그 어느 장소에서든지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느껴지는 여성이 일을 하고 있고, 내가 그 사람을 불러야 할때)이모님들은 필요한 음식(그외 물건 등)을 가져다 주시는 분들이니까 더이상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경우의 이모님들인 것이다.
내가 이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언니 또는 여동생의 자식들에겐 '나' 는 그들의 이모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친구들의 자식들에겐 00이모라고 불리는 경우다. 그 친구와의 관계도에 따라 좋은 이모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은 이모가 될 수도 있는 것 같다. 친한 친구들은 나의 별명과 이모를 합쳐서 부르게 한다. 00이모가 아이스크림 자줄께. 00이모야 인사해. 이렇게 나의 친구들이 결혼을 하여 자식이 생기면 나의 호칭도 하나 추가되는 것이다. 결혼한 친구들이 지방에서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내가 이모가 되는 일은 자주 발생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모인 개념은 아직생소하지만 가족구성원이의 생명이 탄생하면 이모가 나를 기억했듯이 나도 누군가의 이모로써 선물을 사줘야 할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식당에서 만나는 무수한 이모님들을 마주칠 때, 가끔 그들의 삶이 궁금해지기는 하지만 묻지 않는 것이 도시인의 삶인 것 같다. 배부르게 먹고나면 다시 배고프기 전까지 들리지 않는 식당. 대한민국 모두의 이모님들은 식당에서 또는 그 어느 서비스업에서든 이모라고 불리며 삶의 전선에서 생애를 이어가는 사람들, 이모. 나의 이모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가끔씩 궁금해지는 것은 내가 이모와의 깊은 교류가 없었던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이모이자 우리 모두의 이모들은 오늘도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누군가의 이모로서 삶을 살아가고 또 어디선가는 다른 명칭으로 이 사회의 상호관계속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나도 언젠간 누군가의 이모가 될 수도, 모두의 이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