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패배의 순간
누구나 말한다. 승진은 실력이라고. 누구는 운이라 하고, 누구는 뒷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떨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왜 그 문턱을 넘지 못했을까.'
이건 한 회사의 패배자가 기록한, 작고 우습지만 나름대로 처절한 세계관이다.
난 승진에서 밀렸다. 승진씬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조직에는 위계가 있고, 그 위계는 언제나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든다. 매출 실적이 좋은 이들은 정치력 있는 이들을 ‘협잡꾼’이라 부르며 코웃음 친다. 일은 못하면서 아부나 한다는 식이다. 반대로 정치력 좋은 이들은 실적 좋은 이들을 ‘순진한 개미’쯤으로 여기며, 자신이 그들보다 한 수 위라고 착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사이, 이들의 풍파에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있다. 구김하나 없이 말끔한 소위 '금쪽이'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묻고 싶지만 돌아 올 건 그저 배시시 웃는 얼굴일 것이다. 알고보면 애초에 싸움판에 끼어들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다. 판을 짠 쪽이거나, 적어도 그 옆에 선 사람들이니까.
2. 승진의 카르텔
열심히 하면 승진할 수 있을까. 보통 원인이 쌓여 결과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선 정반대다. 먼저 결과가 찍히고, 그에 맞춰 원인이 포장된다.
'원래 그럴 줄 알았다'는 프레임은 실수한 이들에겐 치명적이다. 책상에 커피를 쏟거나 프로젝트에 손실을 내면 매도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승진러들에겐 아주 유리한 장치다. '일단 하고 나면' 사람들이 알아서 해석을 해준다. 성과, 정치, 뒷배, 근속연수에만 들어가면 그만이다. 만약 이 범주에 못 들더라도 승진의 이유는 자연스레 따라온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받는다."는 말은 적어도 이 회사 승진러들에게 아주 정확한 묘사였다.
3. 클리셰
경찰이 주인공인 영화엔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특진. 그것도 좀 더 힘든 일 엔 2계급 특진. 어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언더커버로 숨어 지낸다. 유혈이 낭자한 싸움판에 휘말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전엔 그걸 과장된 연출이라 여겼다.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
그런데 승진에서 밀려나 보니 알겠다. 그건 진부한 게 아니라 대체로 그렇게밖에 안되는 구조였다. 이제부터 클리셰라 치부하기 전에, 그게 왜 클리셰가 됐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려고 한다. 승진의 세계관에서 목숨 걸긴 매한가지니까.
4. 치졸함
내 패배감엔 좌절, 질투, 냉소, 분노, 겸손, 야심, 희망, 두려움, 초조함이 녹아있었다.
결국 이 조그만 회사 하나에 걸린 내 마음이 이토록 컸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래서 쿨한척, 허무한 척 회사욕을 늘어놓는다. 비전이 없네, 전망이 어둡네 따위의 그럴듯한 말들로. 결국 날 못 알아본 회사는 망해야 한다는 ㅡ정확히는 망하길 바라는ㅡ 그런 얄팍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을 것이다. 이 불안이 날 비겁하게 만들었다. 시험기간에 공부를 안 한 척했고, 좋아하는 여자의 주변만 맴돌다 놓쳤다. 비루해질까 봐, 그게 싫었던 거다. 승진도 마찬가지다. 관심 없는 척, 태연한 척, 속세와는 거리를 둔 듯 유유자적 안빈낙도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 그냥 졌다고 말하기가 싫었다.
5. 우물 안 개구리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드라마 <미생>의 대사다. 조치훈 9단이 한 말을 장그래가 참조했다. 그리고 덧붙인다.
"왜 그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시냐, 바둑일 뿐인데."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패배를 인정하기로 했다. 우물밖의 누군가는 개구리를 하찮게 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도전하기로 했다. 우물 안에 있기로 했으니까. 개구리에겐 그게 세상이고 우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