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어떻게 생겼을까(look like)

영화 <브루탈리스트> 나의 해방일지

by 산문꾼

자유란 무엇일까. 흔히 우리는 억눌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여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그리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자유'라는 말이 너무 당연해 보이고, 그 안에는 진짜보다 허상이 더 많이 섞여 있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자유는 점점 자본과 권력, 즉 위계 구조 안에서만 작동하고 있다. ‘남들보다 나아야만 자유롭다’는 암묵적인 룰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추앙하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통제당하고 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그런 자유의 상징, 미국으로 건너온 한 이민자의 이야기다. ‘라슬로’는 이전 나라에서는 각광받던 천재 건축가였지만, 이민자 신분으로 살아가며 차별받고 멸시받는다. 그는 끼니를 걱정하고, 잠자리를 고민하는 밑바닥 삶에 내몰려 있었다.


그러던 중,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밴뷰런’이 자신의 이름을 건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맡기며 그를 후원한다. 잠시나마 다시 일어서고 성공하는 듯했지만, 돌연 프로젝트가 중단되며 라슬로의 삶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영화는 그의 흥망성쇠, 그중에서도 ‘망’과 ‘쇠’에 더 깊게 방점을 찍는다.


라슬로의 삶은 묘하게 꼬릿꼬릿한 냄새가 난다. 그가 찾았던 사창가는 음침했고, 영화관에서 본 성인영화는 기괴했다. 현실을 견디지 못해 손을 뻗는 마약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숨구멍 같았다. 다듬어지지 않은 욕망들, 감춰지지 않은 민낯들. 불쾌하고, 고약하고, 찝찝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눈을 떼기 어렵다. 싫지만은 않다.


관객으로서 나는 회복의 서사를 기대했다. 저런 천재가 다시 일어나, 세상에 인정받고, 부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영화는 내 기대를 틀었다. 라슬로는 재기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무너진 자의 시선과 더러운 세계를 기꺼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건축으로 쏟아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라슬로가 마주한 사창가, 성인영화, 마약은 그저 타락의 표식이 아니다. 그는 그런 더럽고 불쾌한 풍경들조차 감추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못나고 부끄러운 나도 나니까. 그는 끝없이 무너지면서도 자신을 지우지 않는다. 남겨지더라도, 끝까지 자신으로 남으려는 사람. 흔적, 잔해, 구조물—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라슬로는 처절할 만큼 인간적인 생존을 추구한다. 무너진 와중에도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기억과 상처를 숨기지 않는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마감되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은 오히려 과정 그 자체를 드러낸다. 투박한 표면에 새겨진 삶의 자국들.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 진짜 같은, 불완전함. 그것이 오히려 아름다웠다.


바로 이 꼬릿꼬릿한 날것의 삶 속에서,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철저히 연출된 PPL 범벅의 '리얼' 예능도, 골라낸 한 장의 사진을 무심한 척 올리는 SNS도 흉내 낼 수 없는. 냄새나고 지저분하지만, 그 안엔 거짓이 없다. 진짜 자유는, 그런 데 숨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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