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게 한 "작은 아씨들"

마흔에 돌아본 세상 | 첫번째 이야기

by NaRio


어떤 천성들은 억누르기엔 너무 고결하고 굽히기엔 너무 드높단다.”



조가 에이미때문에 너무나 화가 났을 때, 어머니가 해준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조가 아무리 자신을 억누르고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결국은 드러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어머니 스스로도 자신이 감추고자 했던 속 깊이 담긴 천성이 있다는 것을 자조적으로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다.

마흔이 되어 다시 본 <작은 아씨들>은 조의 나이일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머니가 조에게 “넌 참 나를 많이 닮았어”라고 말한 것처럼, 나 역시 다시 본 <작은 아씨들>을 통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조를 바라보며 자신이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을, 분명 네 자매의 어머니는 떠올렸을 테니 말이다.


2020년 한국 개봉 <작은 아씨들> 포스터


눈치챘겠지만, 어린 시절을 상기시킨 <작은 아씨들>은 2020년 개봉한 영화이다. 그 이전에 다른 버전의 영화도 보았고, 그 이전에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해진 이야기였다. 어렴풋하지만 책을 읽은 기억도 있다. 이번 영화는 방학을 맞은, 막 10대가 된 딸과 함께 보았기에 더욱 어머니의 마음과 표정에 시선이 갔던 거 같다. 소위 ‘대의’를 위하여 전장으로 떠나버린 남편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네 딸을 키워내야 하고, “내가 남자였다면 참전했을 거야!”라고 내지르는 조의 말처럼 자신도 대의를 위해 싸우고 싶지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은 욕심일 뿐인 여성이다. 대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참전용사와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려 노력한다. 여성이며 엄마이기에 시대의 짐을 함께 지겠다고 말조차 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여자도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어요.”


조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이 뉴욕에서 좌절되고, 번번이 여자이기에 부딪히는 한계를 느끼며 한 말이다. 이 말은 어느 기사에서처럼 2020년에도 유효하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가 어릴 적에는 각기 나름의 꿈이 있지만 모두 좌절된다. 그 시기와 이유는 다르지만, 대고모님의 말처럼 여자는 결혼을 잘하는 것 말고는 잘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2020년은 어떤가? <작은 아씨들>의 배경인 19세기보다는 여성의 사회진출 기회가 많아졌지만, 임금 불평등이나 ‘취집’하면 그만이라는 사회의 시선은 여전하다. 그러니 ‘부자’가 되기 위해선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라 생각하는 여성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조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책이 출판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로리를 선택하지 않고 독일인 교수를 택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결혼에 저항하던 조가 왜 끝에 결국 사랑을 찾는 것으로 마무리하는지에 대해 반문한다. 하지만 조가 엄마에게 자신의 상황을 분노에 차 이야기하면서 마지막에 “그런데 너무 외로워요.”라고 하는 솔직한 한 “인간”의 심정이 이를 대변해준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외로워도 결혼하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거고, 남자는 결혼해서도 외로우면 다른 즐거움을 찾아도 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조가 자신을 엄마의 대용품으로 삼을 것이 뻔 한 로리가 아닌(실제 결혼 후 에이미는 로리를 아이 다루듯 한다), 자신을 작가로 보고 진지하게 글을 읽어주는 독일인 교수랑 맺어지는 것이 맞는 거다. 실제 주변에도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만혼이 되어 동료와 서로의 분야를 인정하며 결혼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서로의 커리어를 존중하면서도 사회의 시선에 대한 버팀목이 되어주며, 함께 감정과 따스함을 나누어 외로움을 상쇄해줄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 말이다.



어린 시절 작은 아씨들 속 조가 너무 멋진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하고 답답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쉽게도 내 주변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저 속으로 끙끙하며 열정만 가득 찼던 때였다. 하지만 계속 곱씹어보니 난 조의 성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첫째 딸로 누군가를 돌보기를 좋아했기에 나는 메그의 성격에 가까웠고, 에이미처럼 미술을 좋아했기에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난 메그처럼 결혼했고, 에이미처럼 재능과 현실의 간극에 순응했다. 하지만 그간 나는 조처럼 열정이 숨 쉴 곳이 필요할 때마다 무언의 발버둥을 쳐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들떠서 영화 감상평을 늘어놓는 나에게 딸이 이야기했다.

“그래서 엄마가 글을 쓰는구나!”

‘아, 그런 거... 였던 걸까?’


(에이미처럼) 그림을 좋아하고 잘 그리는 아이 었던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건 꿈꿔보지 않았다. 하지만 (메그처럼) 일찍 결혼한 후, 삶의 흐름에 따라 나는 글을 쓰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마흔 즈음, 나는 일기를 쓰는 것을 즐기고 책을 사랑하며 글을 쓰는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마 딸의 말처럼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조가 있었던 모양이다.


‘알아챔’, 이것은 마음을 치유할 때 첫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간 나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 내 마음속 ‘조’를, 그리고 ‘조의 열정’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끄집어낼 차례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은 베스가 죽은 후 조가 며칠을 거의 자지도 않고 소설을 쓰는 장면이다. 원고를 한 장 한 장 바닥에 펼쳐놓고 손이 아프면 펜을 다른 손으로 옮겨 잡으며, 글을 쓰는 조의 모습은 열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과 같이 컴퓨터로 쓰는 시대에는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기에 왠지 더 투쟁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적 한계를 모두 극복하고 해낸다는 느낌 말이다. 영화 속 조가 슬픔을 글로 승화시켰듯이, 몸의 고단함도 괘념치 않고 글을 써냈듯이, 내 속에 숨은 열정도 이제는 조금씩 꺼내도 되지 않을까. 금방 <작은 아씨들>과 같은 작품을 써낼 수는 없겠지만, 조가 계속 글을 썼던 것처럼 나 역시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자신을 온전히 담아내면서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몰라서 혼란스러웠던 이십 대, 눈앞에 닥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던 삼십 대를 지나, 이젠 관심을 둬야 할 것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은 조금 구분하게 된 나이이니 말이다. 내 마음속의 조가 아직은 세상에 나오기 힘들어할지 모르니, 조금씩 용기 내어 나의 이야기를 꺼내봐야겠다.




<작은 아씨들>에서 당시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인 만큼 네 소녀가 엄마도 아빠도 없는 시간에 집에서 하는 놀이가 나온다. 그건 바로 연극이다. 이 때 조는 자연스럽게 극본을 썼고, 자매들과 함께 자신의 글을 상연한 경험은 조가 훗날 글을 쓰는 작가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집콕을 하고 있는 요즈음 나의 작은 딸은 비록 자매들은 없지만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갑자기 생긴 여유 시간을 나름의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행인 것은 그저 바보상자를 바라보듯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름의 덕질을 하고 있다. 우리 집 작은 아씨는 훗날 어떤 꿈을 꾸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