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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안 Nov 16. 2023

당근거래 바람맞은 날

기억을 믿지 마세요, 알람을 믿으세요

안녕하세요. 제가 나눔 받을 수 있을까요?



다음날 아침, 10분이면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길을 나섰다. 아이가 보고 싶었던 책 한 질이 당근마켓 나눔으로 올라와 운전대를 잡았다. 보고 싶었던 책, 컨디션도 좋다고 하니 얼른 받아와야지~ 룰루하고 콧노래가 나왔다.


"저 도착했어요."

...

"왜 연락이 안 되실까요?"

...

...

...

당근마켓 통화기능을 이용해 전화를 걸어본다.

 

세 통.

...



 바퀴 달린 루마를 끌고 약속장소에 도착해 연신 연락을 시도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늦가을 비에 한 손엔 우산, 한 손엔 휴대폰을 든 손이 차가워져 시리기 시작했다.

'나와의 약속을 완전히 잊었구나' 



"기다리다 갑니다..."



우산을 차에 넣으며 매너평가에 '비매너'버튼은 누를 뻔했다. 나 그렇게 하지도 못한 건 그분의 나눔 이력 때문이었다. 질 좋고 깨끗한 책들을 많이 나눔 한 기록들, 좋은 나눔을 응원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말도  수 있었다.


분명 좋은 분 같은데 나는 왜 여기서 덜덜 떨고 있어야 하지? 끙..

아무튼 처음 중고거래 바람맞고 몸도 마음도 기운이 쭉 빠졌다.





근처 카페로 가서 커피 한잔으로 손을 녹이고 친구와 통화하면서 투덜거렸다. 비 오는데 당근 바람맞았다고.

커피도 마시고 친구와 수다도 떨어 기분이 좀 나아질 즈음,


딩동! "제가 오늘 아이 학교 안 간다고 자버렸네요."

딩동! "너무너무 죄송해요."

딩동! "지금 어디세요? 댁이 어디세요?"

딩동! "어떡하죠? 깜빡했어요ㅠㅠ


연신 울리는 알람에 그분이구나 싶었고 채팅창의 메시지를 보며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괜찮아요. 근처인데 지금 다시 갈게요."


다시 간다는 말에 두 번 걸음 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진심이 느껴졌다. 얼른 가서 책을 받아왔다.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생각하니 추위에 얼었던 마음도 사르르 녹았다. 나눔 받고 스타벅스커피 쿠폰도 선물로 드렸다. 아이가 잘 볼 책을 받는 입장에서 책 값의 아주 일부라도 그 수고에 감사하며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나이 듦의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기억력 감퇴가 이런 거구나 몸이 느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의 경우 둘째 출산 이후 그 전후가 확실히 달라진 게 느껴질 정도로 건망증이 있었다. 예전에 가르쳤던 아이들 얼굴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거나 방금 뭘 검색하려고 했더라 이런 것들.


이런 건망증은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닌 거 같긴 하다. 검색창에 '뭐'라고 치면 '뭐 하려고 했더라'가 자동으로 뜨는 걸 보면. 짧은 순간 얼굴모를 검색사이트 이용자들과 동병상련을 느끼기도 하니까.


계획적이고 치밀한 성격과는 거리가 먼 나이지만, 그렇기에 의식적으로 휴대전화 캘린더를 쓰려고 한다.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스케줄을 함께 소화하려면 캘린더 메모와 알람은 필수다.  특히 초등 저학년 때에는 하교 시간은 빠르고 두 아이 다니는 기관이 다르고 가끔 화상 수업도 있으니 요일별로 잊지 않도록 알려주어야 한다. 계획적인 것을 잘 못하는데 계획된 것을 따르려고 캘린더를 쓴다. 일명 생존형 캘린더.






비 오는 날 당근마켓 약속에 바람맞았지만 


(시간을 잊은) 실수는 용납하고

(책을 나눠준) 호의엔 감사하며



그분께, 또 미래의 나에게 말한다.


"기억을 믿지 마세요. 알람과 캘린더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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