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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안 Dec 09. 2023

지극히 개인적인 피아노

30년을 돌아온 취미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4년 전 결혼기념일 즈음, 남편이 물었다.


- " 피아노. 피아노가 갖고 싶어." 기다렸다는 듯한 나의 대답.


"열매(첫째)거 말고. "


-" 내 건데? 피아노 치고 싶어.."


"가끔 그렇게 생각지 못한 얘기를 하더라."


 예산을 뛰어넘는 지출이었으며 좁은 집에 피아노를 들일 공간도 마련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제껏 안치고도 잘 살았는데 피아노를 굳이 갖고 싶어 하는 걸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남편 생각이 맞았지만 진행시켰다. 이번 선물은 누가 뭐래도 피아노다.


취미는 그런 것 아닌가. 하고 싶을 때 언제라도 내 손이 닿는 곳에서 시간을 들여 즐길 수 있는 것, 일상에 지친 스트레스를 녹일 수 있는 나만의 유희.


'선물'은 기념일에 맞춰 우리 집에 들어왔다. 딸아이가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아이와 함께 칠 수 있다는 건 그럴듯한 구실이었을 뿐, '내 피아노'가 갖고 싶었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둔 지 장장 30여 년 만에,  피아노가 치고 싶었다. 30년 전 엄마의 사교육이 드디어 소기의 목적달성을 하는 순간이 왔다.


'어머니! 저 피아노가 치고 싶어요!'  


이제 엄마는 아무 관심이 없겠지만 어렸을 적 그토록 치기 싫던 애증의 피아노로 연주라는 게 해보고 싶었다.






오랜만이다. 그래도 칠 수 있는 곡이 있어 다행이다. 아로하를 비롯한 슬기로운 의사생활 ost 곡들, My heart will be on(타이타닉 ost) 은 만년 나의 플레이리스트이다. '엘리제를 위하여'도 끝까지 쳤다. 그동안 잊고 있던 중반부는 꽤 연습이 필요했다. 초반부엔 가녀리게, 중반부는 건반을 묵직하게 두드리며 웅장한 분위기를 살려본다. 쉽지만 아름다운 명곡들, 손가락이 움직이는 선율이 귀로 흘러들어올 때 직접 연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연습이 하고 싶을 땐 찬송가를 편다. 코드가 아닌 악보에 맞추어 정직하게 친다. 찬송가는 보통 4절까지 있으니까 최소한 네 번 치고 넘어가는 식으로 연습을 한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네번쯤 치면 점점 손가락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속도가 빨라진다. 가사가 주는 마음의 안식을 더하면 찬송가 연습은 내겐 어렵지만 한곡씩 마스터하는 기쁨을 주는 아주 좋은 시간이다.






취미를 아무리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꺼내보이고 싶고  공유하고 싶은게 사람 마음이다.  못쓰는 글도 브런치를 열어 쓰는 마당에 아쉽게도 나의 피아노는 오로지 혼자만 즐길 때 완벽한 연주가 되곤 한다.


만족스런 연주를 위해 우선 헤드폰 착용은 필수다. 혼자 강약중간약을 조절하며 음악에 심취해본다. 헤드폰 안에 꽉찬 피아노 소리가 맘에 들어 더 잘 치게 들리는 거 같다. 어깨도 들썩거리며 세상 멋진 피아니스트가 된 척 해본다.

"한 번도 안틀리다니. 나 피아노 잘 치네?"

 혼자 우쭐해 본다. 근데 헤드폰 벗고 누가 듣고있거나 듣는다고 느끼면 왜그렇게 똥땅거리게 되는걸까? 잠시 속상하다. 이 멘탈의 벽을 넘기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릴거 같다. 굳이 들려주고 싶지도 않아 아예 헤드폰을 끼워둔다. 이보다 더 개인적인 취미는 없을 거 같다고 잠시 생각한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했던가. 주로 운동할 때 쓰이는 말이지만 이는 악기 연주에도 적용된다. 한번 쳤을 때와 두세 번 쳤을 때의 내 연주가 다른 게 체감된다. 심지어 한번치고 안치다 오랜만에 쳐도 한번 더 쳤던 것이 누적되는게 느껴졌다.



작은 성취의 경험이 성장하는 과정을 이끌어내고 성장하는 과정은 실력이라는 결과로 보답한다. 살아오면서 매번 느끼는 진리이다.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땐 잊어버려 포기하기를 선택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어렸을 적 피아노는 나에게 '포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취이자 즐거움이다. 포기하기까지의 어려움과 좌절 또한 지금의 성취를 가져다준 과정이라 생각하니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학원에 가서 혼나면서 배우던, 연습이 지긋지긋해 다니다 그만두길 반복했던 악기였지만 덕분에 악보를 볼 수 있었고 악보를 보고 지레 겁만 집어먹진 않을 정도의 실력이 남아있었다. 지긋지긋하던 손가락 훈련과 콩나물 대가리가 이제야 빛을 발했다.





여전히 기깔나게 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즐겁다. 어렸을 때 배우다 관뒀다고해서 '괜히 했어. 시간만 버렸네'가 아니었다. 숨어있던 연주 세포들이 튀어나왔을 때 피아노는 진입장벽이 낮은 유일한 악기였다. 역시 인생의 모든 시도는 했다는 자체로 의미 있는 거 같다.


다시는 쳐다보지 않을 거 같아 먼지 쌓여가는 피아노를 보며 담이라도 쌓은 줄 알았지만 마흔의 나는 그런 피아노를 다시 끄집어내어 취미로 즐기고 있지 않은가.


나밖에 못듣는 연주이지만 취미로 즐기는 날에 이르렀으니 


피아노,  친해져서 지금처럼 지극한 자기만족으로 가늘고 길게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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