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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칠 Jan 18. 2023

첫 여행지, 싱가포르.

스물아홉의 나라가 기억하는 스물하나의 나라 (1)


 나는 홀수를 좋아한다.

 나이 먹는 게 싫었는데, 올해(2022년)는 스물아홉으로 아홉으로 끝나는 수라니까 이건 좀 참을만했다. 내년엔 영으로 끝나는데 그것도 나름 참을만하겠다. 영도 나름 신비스럽다.

 올해 마쳐야 하는 중요한 일들을 모두 끝내고 나니 10일간의 시간이 남았다. 할일없이 이틀을 둥굴거렸더니 무척 행복하다. 남은 십 일 동안은 이전의 추억들을 좀 정리해보려고 한다. 매번 하려고 했는데, 할 일에 쫓겨 계속 뒤로 미뤄뒀었다. 이 글을 읽고 과거를 회상할 미래의 나를 위해 딱 10일만 힘내보자!




 2014년 9월, 싱가포르행 비행기표를 사다.

 친구와 동네 롯데리아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 먹고 있었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데, 그냥 뜬금없이 싱가포르행 비행기표를 사버렸다. 4박 6일 왕복 비행기 표였다. 스쿠트항공으로 여행자보험까지 들어주는 표였는데, 사십얼마에 구매했던 것 같다. 나름 매우 저렴하게 잘 산 것 같다고 친구와 좋아했다. 당시엔 육십만 원대가 일반적인 금액대였는데, 지금 보니 4박 6일이라 사십만 원선이었나 보다. 생에 첫 여행을 떠나기 위해 앞으로 한 달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야한다.


 출발 전 새벽에 인터넷면세점으로 입생로랑 립스틱을 샀다. 루쥬 볼립떼 샤인 19호였는데, 보라빛이 영롱하게 이뻐서 도전정신으로 구매했다. 발라보니 색이 나에게 찰떡이다.


 저녁비행기라 공항에서 밥을 먹고 출발하려는데, 친구 오빠가 천사처럼 나타나 밥을 사주셨다. 나는 김치찌개를 친구는 회덮밥을 주문해서 먹는데, 오빠가 피자도 사주더라. 지금보니 양이 무척 많아 보이는데, 당시엔 식은 죽 먹기였다. 우리는 먹는 것에 강했다. 스물아홉의 나는 좀 약해졌다. 이렇게 어른이 되나보다.


첫 여행이라 그런가, 사진이 죄다 이상하게 찍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태국을 경유했다. 첫 해외여행인만큼 이것저것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행을 하는 동안 '무지(아는 것이 없음)'라는 말을 제일 많이 썼다. 이름하여 무지여행! 그래도 승무원 언니가 가라는대로 가고 하라는대로 하니까, 싱가포르에 잘 도착했다. 우리가 예약해둔 윙크 호스텔(Wink Hostel)에 도착하니 아침 7시였다.


 2014년 10월, 싱가포르에 도착하다.

 숙소는 차이나타운 내에 있었다. 하지만 무지여행답게 숙소가 차이나타운내에 있는지 (나만) 몰랐었다. 지도를 잘 볼줄 아는 내 친구는 알고있었더랬다. 이른 아침에 캐리어를 질질 끌며 숙소를 찾아가는데, 중국 느낌이 물씬나는 건물들이나 거리장식들이 보였다. 약간은 친근하기도 혹은 이색적이기도 한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을 걸으며 '여기 뭔가 느낌이 중국스럽다,'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매우 진실에 가까운 감상이었다.


 호스텔에 짐을 풀고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아침이라 조식을 먹을 수 있다길래 1층으로 내려가 토스트기에 빵을 굽고 바나나 하나를 가져다 앉았다. 남자애 하나도 아침을 준비하고 있길래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 받았다. 나와 내 친구, 처음보는 남자애 모두 각자의 아침 준비를 마치고 식탁에 모여앉았다. 다들 아무 말 없이 토스트에 딸기잼만 바르자, 나는 저 남자애와 대화를 해보고 싶어 입이 달싹거렸다. 인싸중에 아싸 아싸중에 인싸, 그게 나인가보다.

짧은 순간동안 머릿속에서 몇 번의 시물레이션을 돌려보았고, 나는 빵을 오물거리는 남자애에게 당차게 인사를 건냈다.

 "이 나라!"

싱가포르에 와서 처음으로 친구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심장은 쿵쿵 뛰어댔고, 손은 핏기가 가셔 저릿했다. 그런데, 어라? 이 남자애가 나를 멀뚱히 쳐다만 보고 못알아듣는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큰 실수를 했다. 외국에서는 이름을 말할 때, 이름을 먼저 말하고 성을 나중에 붙인다. 나는 깨달았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다시 한 번 더 내 이름을 말해주었다.

"아! 나라 이!!"

스물하나의 나라는 왜 그랬던 걸까? 이름을 말하기 전 스몰 토크를 시도할 생각은 안했던 걸까? 아니, 그 전에, 왜 '아이 엠(I am)'이나 '마이 네임 이즈(My name is)'를 붙일 생각은 못했던 걸까? 미스테리다~

다행히 눈치가 빨랐던 그 남자애는 내가 내 이름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아들었고, 친절히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내 친구와 그 남자애가 '이름 사건'으로 한바탕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쥐구멍에라도 숨고싶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되었다. 사실 나도 너무 웃겨서 실신 직전까지 웃어버렸다.


당시에 사진을 세로로 찍겠다는 의지가 있었나보다.


 방에서 조금 쉬다가 11시쯤 거리로 나왔다. 아침에 봤던 풍경이랑은 다르게 사람들이 거리를 빽빽하게 매우고 있었다. 거리에 활력이 돌았다.

13시에는 카야토스트를 간식으로 사먹었다. 카야토스트가 그렇게 맛있을줄 몰랐는데, 세상에! 무척 맛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에 카야잼도 사왔는데, 집에서 먹으니 그 맛이 아니었다.

토스트에 이어 레몬 요구르트까지 사마시고 club street을 걸어다녔다. 집들이 알록달록해서 이뻤다. 그대로 걸어 maxwell road food center에 갔다.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참새들이 아니었다. 푸드센터에서 치킨라이스와 락사를 사먹었다. 치킨라이스는 삼삼하고 촉촉했다. 락사는 향신료의 향이 많이 느껴져서 나는 먹지 않았다. 지금의 나라면 매우 좋아했을텐데. 팔년 세월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여행 첫 날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던 탓일까? 당시의 내가 조금 예민하고 사나웠던? 기억이 있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우리들의 즐거운 여정을 위해 다양한 여행 자료를 열심히 모았다. 친구가 좋아할만한 곳, 우리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여기 푸드센터도 그 중 하나였다. 진한 향신료의 맛을 좋아하는 친구가 무척이나 좋아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온 곳이었는데, 음식을 먹기도 전에 보인 친구의 반응이 왠지 싸늘하게 느껴졌다. 나 혼자만 여행의 설렘에 부풀어있는 것 같은 기분에 속상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씩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이때 내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친구는 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최대한 락사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첫 날 하루 종일 많이도 걸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머라이언 공원(Merlion Park)으로 넘어가 머라이언 상을 보며 실컷 웃고 떠들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이 많은데, 대부분 노출값이 이상하다거나 초점이 안맞는 등 사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컷들 뿐이라 혼자서만 간직해야할 것 같다.

 우리의 얼굴보다는 풍경이 더 이쁘게 나와야 한다며, 강가에 앉아 '눈썹샷'(얼굴 중 오로지 눈썹만 살짝 나오게 찍음으로써, 우리의 모습보다는 사진의 뒷 배경이 훨씬 많이 담기게 하는 사진 컷 기법; '무지여행'과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가 나름대로 정한 이번 여행의 메인 사진기법이다.)을 찍어댔다.

 놀고 놀다 지쳐 아까 구매해 둔 싱가포르용 유심칩으로 갈아끼우려는데, 이번 여행을 위해 애정어린 마음으로 장착해둔 핸드폰 방수케이스가 벗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줘봐도, 이빨로 물어 뜯어도 케이스는 열리지 않았다. 정말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겠다. 비싸게 주고 샀더니, 화는 나지만 그 값어치를 하겠다. 힘겹게 이빨로 케이스를 벗겨내자 또 다른 난관이 닥쳤다. 우리에겐 유심칩을 열 수 있는 뾰족한 핀이 없었다. 꽤 오랜시간동안 유심칩을 열기 위해 오만 가지 짓을 다 했는데, 왜 때문인지 친구의 신발을 뜯기도 했다. 결국 어느 중국인 여행객 가족의 어머니에게 귀걸이를 빌려 유심칩을 바꿔낄 수 있었다.

 방수케이스와 유심침과의 정적인 사투를 벌이며, 우리는 지칠대로 지쳤다. 상대방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짜증이 났고 우린 그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짜증내서 미안한 마음 반, 지치고 예민한 마음 반, 절반의 마음들이 어색하고 무거운 공기를 만들어냈다.


 다행히도 우리의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River side point에서 첫 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리버 크루즈를 타고 레이져와 라이트 쇼, 그리고 싱가포르의 반짝이는 야경을 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마음이 몽글몽글 해졌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여행의 국면에 접어든 기분이었다. 아름다운 기분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옆에 있어서 좋았고 동시에 이 행복한 순간을 가족과 함께 즐기지 못해 아쉬웠다. 좋은 걸 보고 맛있는 걸 먹으면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난다더니, 정말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 이미 소중한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마음이 서로에게 닿았던 것 같다.

 크루즈에서 내리자마자 클라키 근처의 파스타집에 들어가서 메쉬드포테이토치즈, 새우아보카도피자, 토마토해물파스타, 크림해물파스타, 망고주스, 콜라를 시켜먹으며 서로 어색하게 느끼고 있었던 서운한 감정에 대해 풀어내는 시간을 갖았다. 사실 배도 고팠지만, 음식보다는 우리가 나눈 대화가 더욱 맛있었다. 이 시간을 계기로 남은 여행의 모든 순간들이 서로에게 진실해지게 되었다. 숨기는 감정 없이 무엇이든 솔직해 지기로 했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기분 좋은 것, 서운한 것, 전부 나누고 배려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려하니 각자가 얻고 싶은걸 얻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 회상여행기 첫 날 정리 : 친구와의 여행에서 중요한 키워드. 솔직함, 대화, 서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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