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수업에서 접한 마리타 스터르큰의 『영상문화의 이해』 1장을 읽고 남긴 리뷰입니다.
이 책의 1장은 ‘보기(seeing)/바라보기(looking)’의 구분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여기서 보기(seeing)는 우연적으로 스쳐가는 시각적 감각 전반을 일컫는다면, 바라보기(looking)는 목적성과 방향성이 함축된 행동이라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이후의 요점을 대충 간추리자면, 저자는 바라보기를 실천적 맥락과 연결하고 그로부터 ‘재현, 이미지와 관념’ 등등의 개념들을 살펴가며 최종적으로는 ‘기호학적 해석’에까지 도달하려는듯 보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충분히 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고스란히 따라가기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즉 이 책에서 의도 되는 것처럼 ‘보기’가 그대로 기각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바라보기’ 외의 영역이 모두 ‘보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보기(seeing)의 세계는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해석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기호학을 포함한) 시각적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뤄지는 시각적 총량을 생각해보면, 사실 대부분의 시각적 활동은 오히려 ‘보기’인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쉬운 사례를 들어보자. 가령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주요 쟁점은 동백꽃에 내재된 낭만성에 초점화되는데(참고로 얼마 전 우리 과에서 나온 논문이다), 이를 본 글에 대입하여 고민해보도록 하자. 과연 낭만성은 보기(seeing)와 바라보기(looking) 중 어느 지점에서 재현되는가. 우선 '바라보기'의 맥락에서 연구한다면 아마도 대사의 의미, 캐릭터의 역학, 상징 등등 각종 화면에 보여지는 표상들을 기표-기의로 분절하여 그것의 함의를 파악하고, 이로부터 낭만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추출된 인자들만을 갖고 다시 전체를 재구성해보면 처음의 '낭만성'을 느끼기에는 분명히 어딘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다시 말해, 이것이 진정으로 <동백꽃>의 시청자들이 감상적으로 느끼게 하는 핵심 요인들인가? 라고 하면 적어도 필자는 회의적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필자가 보기에 '낭만성'은 가시화 혹은 언어화되지 않는 추상성의 영역(보기의 맥락)으로부터 더욱 깊이 영향받는다. 사실 이것이 작품의 분석을 한층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한데,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낭만적으로 느끼게 하는 느낌'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다. 애써 특정하자면 이를 동화적 정서 혹은 메르헨적인 어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요점은 본고의 관점에 국한하여 볼 때 이것들은 오히려 보기의 영역에 해당되는 범주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수신자는 기표나 그에 내재된 의미 의외의 영역에도 많은 영향을 받으며, 바로 그로부터 해당 작품의 인식 총체를 구성한다. '바라보기'의 한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1장의 담론은 사실은 인간이 시각적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을 고려하는 듯 보이지만, 명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이성과 사고’의 판단 하에서 이뤄지는 해석에만 한정하고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자면 ‘시각적 무의식(벤야민) 혹은 해석조차 이뤄지지 않는 피상성의 영역’에 대한 기각이 잠정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새로운 학문적 지평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이미 시도되고 있는듯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급작스럽게 펼쳐졌던 기호학의 유행이 급히 지나간 이유도 결국 이 부분과 연결된다고 판단한다. ‘의미 문제’에 주목하는 기호학으로부터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세상 모든 것이 의미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호학의 연구자들이 깨달은 것이 아닐까. 학계 전반에서 최근 유행하는 정동 연구나 감각성, 분위기 연구의 조류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기호학의 부족한 부분들을 메꾸려는 시도라는 생각도 함께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