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레전드 선수들로부터 오랜 추억을 소환하는 방식에 대해
십년 넘게 함께해왔던 야구를 그만둔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한때 열광적인 롯데팬이었지만 어느 시점부터 경기를 보지 않게 되었으며 사회인 야구단 활동도 조금씩 줄여나갔다. 좋은 기억들이 많았기에 가끔 손때 묻은 글러브를 꺼내어 손질하지만 그것도 흘러간 일들에 불과하게 되었다. 내 방 한구석에서 낡아가는 야구공처럼 야구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켠으로 조금씩 바스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달 전 넷플릭스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꾸만 치워도 나타나는 이름. <최강야구>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마침 보던 것도 다 봤겠다, 별 생각없이 틀은 그 영상에는 오래 전의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선수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지금은 프로 경기에서 보고싶어도 더 이상 볼 수 없는 선수들. 아하, 어쩌면 그들 세대의 은퇴와 함께 나의 야구인생도 함께 저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영상에서 하나씩 소개되는 선수들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한창 롯데팬인 시절에 참 미워했던 선수들도 있었고, 승부근성이 퍽 대단하다고 여겼던 선수들도 있었고, 저 선수는 참 잘 던졌지, 저 선수는 참 불쌍했지, 그렇게 낡은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프로그램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실, 이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딱히 분석을 시도할 만한 구석은 없다. 객관적으로 말해 이 프로그램은 포맷적으로나 서사적으로 아주 남다른 것은 없다. 은퇴한 프로-아마 대결이라는 흥미로운 대립구도와 레전드 선수들이라는 독특한 차별점은 있지만 캐릭터와 서사들을 '유의미한 강점'으로 내세울 정도까지는 아니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의 내적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해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를 만족스럽게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십 년 전에 KBS에서 방송했던 <천하무적 야구단>의 예능 포맷에서 극적으로 달라졌다고 확언하기도 어렵다. 선명한 화질, 금 더 탁월한 카메라워크와 현장에 몰입을 가능하게 하는 스포츠 촬영 기법, 그리고 피칭과 타격, 아웃 등 결정적인 순간을 찍어내는 슬로우모션 정도가 추가된 정도다. 거기에 선수 각자의 사연과 고충이 스토리텔링되어 캐릭터들을 좀 더 살리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담백하게 정리하자면 은퇴한 프로-아마추어의 야구 중계에 약간의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가미된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뒤흔든다. 포맷이나 서사 자체의 탁월함으로 유발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짓이 나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때 프로에서 전설이라 불렸던 선수들이 부끄러움을 내던지고 덕수고, 충암고, 동의대.. 어린 아마추어 선수들과 맞부딪히면서 자신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행한다. 선수 하나하나가 전성기가 한참 지나 따라주지 않는 몸을 이끌고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른다. 때로는 왕년의 관록을 보이며 수월하게 끝내고, 어떤 경기는 세월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며 힘겹게 마무리된다. 최고의 무대에서 떠났더라도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희노애락을 나누고 한 팀으로서 결속을 다져나간다. 참 반갑고 참 서글프다. 그 모든 장면들을 보며, 나는 나의 오랜 기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능'을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차라리 '드라마'라고 하겠다.
결국 <최강야구>의 핵심은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수신자'의 추억에게 있다고 하겠다. 지나간 수십년 동안 그들을 지켜보며 쌓였던 수신자의 기억과 애정이 자발적으로 의미부여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따져 물어야 하는 점은 '추억'을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소환하느냐일 터이나, 필자가 보기에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그들의 '투쟁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별도의 도전적인 포맷 구성이나 예능적 편집이 없이 단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인데,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찬란하게 빛났고 저물었던 선수들이 어린 선수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는 모습을 본다는 이유로 수신자는 자연스럽게 충족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거기에 풍부한 의미를 부여하며 서사를 재구성한다. 더 이상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도전에 깊이 만족하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수신자는 그들의 전성기를 직접 지켜봤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이들이다. 달리 말하면 예능이나 '콘텐츠'라는 측면보다는 야구 자체에 더 애정이 있으며 오래된 미디어적 관습에 편안함을 느끼는 이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험을 시도하지 않고 익숙한 방식에 충실하는 프로그램의 방식은 매우 현명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지금으로도 충분히 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에게 각별히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최강야구>의 느낌을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체감될 지는 모르겠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을 다시 방송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