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성공률 99.5%의 역설
한국의 국가 R&D 성공률은 99.5%에 육박한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누군가는 이 숫자를 보고 감탄할지도 모릅니다. 한국인 특유의 집념과 성실함이 빚어낸 기적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곧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소위 기술 강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의 R&D 성공률은 고작 20% 내외에 불과합니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곳에서 왜 80%가 실패할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들은 될 법한 일이 아닌 세상을 바꿀 일에 도전하기 때문입니다.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뛰어듭니다. 실패 그 자체가 혁신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성공률 99.5%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숫자는 실패할 것 같은 연구는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실패가 곧 자원 낭비이자 죄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혁신 대신 안전한 정답만을 선택해온 것입니다.
99.5%라는 완벽에 가까운 숫자가 사실은 가장 불완전한 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연구실과 회사는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패를 대하는 방식만큼은 아주 닮아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길을 선호하고, 위험을 감수한 파격적인 시도보다 무난한 정답을 내놓는 태도를 높게 평가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실패 혐오의 정서는 연구 현장을 넘어 우리 직장 문화의 근간인 연공서열제로 이어집니다.
나이가 차면 연봉이 오르고, 버티기만 하면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
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튀지 마라.
도전하지 마라.
가만히 순서를 기다려라.
여기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자가 아니라 대책 없는 자로 분류됩니다.
새로운 길을 찾는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은 응원이 아니라 걱정이라는 이름의 만류이고, 때로는 노골적인 비난과 조롱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연공서열이라는 안락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창의성이라는 날개를 스스로 꺾으며,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좁은 새장 안에 머물기를 선택해왔습니다.
저 역시 그 감옥의 문을 열고 나왔던 날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공채의 벽을 넘었던 날, 부모님 얼굴에 번졌던 안도의 미소를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것은 정해진 궤도 위를 무미건조하게 달리는 기차였습니다. 목적지도, 속도도 이미 정해져 있었고,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할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궤도를 이탈하기로 결심했을 때,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회적 냉대가 아니라 아버지의 침묵이었습니다. 자식의 안정을 평생의 보람으로 여기셨던 분에게 저의 퇴사는 곧 실패였고, 인생에 대한 부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밥상 위에 흐르는 어색한 정적 속에서 저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단지 내 삶을 내가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실패가 죄가 되는 사회는 이토록 잔인하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마저 서먹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절망하기엔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것만 골라서 실패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사회 전체가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변화의 조짐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부는 R&D 혁신방안을 통해 도전적 연구에 대한 성공/실패 등급 폐지 방향을 밝혔습니다. 또한 실패를 용인하는 연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계도전 R&D 프로젝트가 확대되며, 제도적 기반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완전한 전환은 아닐지라도 실패를 무조건 죄나 낭비로 보던 경직된 태도에 분명한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기업들 역시 연공서열의 사슬을 끊고,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체질을 바꾸며 실패의 자산화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우리 세대의 인식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직이 붙여주는 이름표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명함에 적힌 회사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써 내려간 서사로 스스로를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디 다니세요?"라는 질문보다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이 더 자연스러워진 시대, 그 전환의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실패가 죄가 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실패의 정의를 다시 내리는 것입니다.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공채를 그만두었던 경험, 다시 맨바닥에서 시작했던 떨리는 첫걸음. 이 모든 순간은 실패라는 단어 하나로 묶기엔 너무나 소중한 성장의 타임라인입니다. 낮은 가능성에 몸을 던져 얻은 오답이야말로 커리어를 완성할 가장 강력한 서사가 될 겁니다. 정답만 적힌 시험지보다 오답으로 가득하지만 끝까지 고민하며 풀어낸 시험지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이 길이 맞을까?" 스스로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흔들림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고, 성장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궤도 위의 기차는 흔들리지 않지만,
자기 발로 걷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