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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21. 2021

시각적 현저성의 함정에 맞서서

장애는 의학적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인 것인가?

우리는 지식인이 되기 위하여 공부를 한다. 지식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지식인이 되려 하는가? 지식인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인의 역할과 의무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오늘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식인의 책무 중 하나가 바로 상투적 관습으로부터 반성되지 않은 ‘보이는 것 본질주의’와 ‘시각적 현저성의 함정’으로부터 싸워 이기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시각에 취약하다. 시각은 인간이 거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 수 있도록 해 주었지만, 한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시각자극이 직관적으로 너무 강력하게 와닿기 때문에,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그 시각적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이 그 대상 자체에 있다고 간주하도록 유도된다는 것이다. 즉, 시각의 막대한 현저성(돌출성, Saliency) 때문에 인간은 충분한 통찰력이 없는 한, 대상에게 보이지 않게 연루된 모든 정치 · 사회적 맥락을 지우고, 대상이 처한 상황의 이유를 그저 눈에 보이는 대상 그 자체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보이는 것 본질주의’ 혹은 ‘반성되지 않은 시각중심성’은 이 반성되기 시작한 것은 자연과학에 있어서 과학방법론이 등장한 최근이며, 사회과학에 있어서 그보다 더욱 훨씬 최근의 일이다.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누적되어온 통찰과 성찰 없는 발언과 소통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문화적 굴레로 작용해 왔다. 그것이 더 많은 발언권에 의하여 지배되었으므로 권력자와 지배자의 반성되지 않은 시각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의 가장 보편적인 사례가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전통적인 피해자 비난하기(Victim-Blaming)일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담론장에서 소외되고 부차적으로 간주되었던 여성이 성폭력 피해 등을 입었을 때, 그것에 관하여 말하는 발언자들이 자신의 시각을 반성적으로 숙고하지 않은 채, 여성인 피해자를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을 그대로 투영하여 ‘여성이 성범죄를 유발하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또는 ‘여성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는 사례 등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성폭력이 발생하게 된 보이지 않는 사회적 맥락과 권력의 배치를 살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여성의 현저한 모습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거나 자신이 여성을 보는 관점을 반성 없이 투영하다가 그런 심각한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양식 있는 상당수의 사람은(양식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성폭력과 같은 명백한 범죄로 인정되는 범주에 대하여서는 폭력이나 차별의 피해가 피해자 탓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영역에서 ‘반성되지 않은 보이는 것 본질주의’가 거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장애인에 대한 관점의 문제가, 젠더 폭력 문제가 어느정도 상식적 수준의 담론장에서 정리되어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선을 기다리고 있는 이슈이다.


물론 오늘날 담론장에서,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정도의 수준까지의 교육과 합의는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애란 무엇인가? 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보이지 않는 개념에 관한 이해는 아직 그것보다는 훨씬 뒤쳐져 있다. 장애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육체적 완결성과 완전한 기능성의 훼손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건강한 어떤 상태가 존재한다고 간주하고, 또한 그것은 표준적인 상태라고 간주한 뒤, 어떤 사람의 육체의 일부분이나 기능 가운데 일부분이 영구히 상실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장애라고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장애의 의료적 모델’ 혹은 ‘장애의 개별적 모델’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장애분류(ICIDH-2, 1997) 등이 이러한 관점을 다른다. ICIDH는 질병(Disease · Disorder)이 손상(Impairment)을, 손상이 능력장애(기능장애, Disability)를, 능력장애가 사회적 불리(Handicap)을 필연적이고 연쇄적으로 가져오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장애의 본질을 단지 특정한 신체가 손상되거나 절단되었다는 대상 자체의 특성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보이는 것 본질주의’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을 둘러싼 영향력의 범주를 보다 넓게 파악하여, 장애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 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허라금은 자신의 논문 『인식의 체현성과 도덕 추론의 방법 : 여성주의 실천적 대화』(2015, 링크)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소개하였다.


워싱턴 D.C. 에 사는 한 레즈비언 커플인 샤론(D. Sharon)과 캔다스(M. Candace)는 정자를 기증 받아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다. 이들 두 여성은 선천적 청각장애자이다. 그들은 청각장애 아기를 임신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청각장애아 유전자를 가진 기증자의 정자를 받고자 했다. 상업적 정자은행이 유전적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기증자의 정자는 받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선천성 청각장애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낳았다. 그렇게해서 태어난 두 아기들은 모두 청각장애아였다. 이 사례는 2002년 초 워싱턴 포스트의 한 기사에 의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그것은 빠르게 “청각장애 디자이너 베이비” “청각장애 아이 선택”이란 이름이 붙여진 많은 논평과 기사들을 생산했다 (Page. 93)


이는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그것은 주로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디자인 베이비(Design Baby)의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 베이비를 심지어 고의적으로 귀가 안 들리게 태어나게 하는 행위에 관한 극심한 윤리적 비판이었다. 비판자들은 이것을 자녀에 대해 고의적으로 영구적인 장애를 유발한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허라금은 같은 논문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 “비판적인 이들은 누구로 부터도 해침을 당하지 않아야 할 자녀의 개인권이 부모의 자율권보다 우선적이라고 주장한다. 부모는 자녀를 해치지 않을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피할 수도 있었을 장애를 선택한 것에 대해,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의 “열린 미래” 가능성을 제한한 것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다.” (같은 논문, Page. 94)


이러한 관점은 내가 ‘육체적 최대주의(Physical Maximalism)’라고 이름붙인, 완전하게 기능하는 최대로 건강한 육체를 상정하고 그것의 일부를 빼앗는 것을 일종의 폭행 행위로 보는 입장을 반영한다. 물론 나 역시도 이것이 상식적으로 적절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녀를 포함한 타인에 대한 윤리적 행위는 최대한의 가능성과 선택권을 주는 것에 있기 때문이며, 귀가 안 들린 이후에 듣게 할 수는 없지만, 귀가 들린 이후에 안 들리게 할 수는 있으므로, (만약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귀가 안 들리는 유전자를 물려주기보다는 귀가 들리는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이 그 대상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선택권의 범위가 더 넓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자녀를 ‘모태신앙’ 이랍시고 어려서부터 특정한 종교적 제의를 주입하면서 기르거나, 부모의 판단 하에 홈스쿨링을 시키는 것 역시 타인의 선택권을 해치는 것으로서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례에서 단지 ‘육체적 최대화만이 답이다’ 라는 교훈만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절반의 해석이다. 우리가 추가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농인 커뮤니티에서 함께 살아가도록 양육하고자 하는 자녀가 공동체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하였던 양육자 부부의 의도이다. 물론 자식이라는 타인의 인생에 고의적 손상을 준 것은 범죄의 영역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행위이지만(왜냐하면 거기에는 재생산권이라는 또다른 복잡한 모성권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장애의 이유로 재생산권을 건드리는 것은 당연히 반인권적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장애인 강제불임수술 등의 심각한 역사적 과오가 있기 때문에 매우 문제되는 발상이다), 농인 커뮤니티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그 부부의 농인으로 태어난 아이가 살아가는 것이 정말로 불행하고 문제가 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딱 잘라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그 부부도 단지 어리석거나 악해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라, 농인 가족과 공동체에서 두 엄마와 함께 자라나는 데에 청력은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사례는, 좀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사회복지학의 유명한 사례인 마서즈 비니어드 섬 (Martha's Vineyard Island)을 떠올리게 한다. 마서즈 비니어드 섬은 1640년대 영국 켄트 지방의 이주자들이 건설한 곳인데, 원래 유전병으로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비율이 높았다. 그곳은 교통이 불편한 섬이었기 때문에 친족간의 혼인률도 높을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유전적 고립이 발생하여 청각장애 발병률은 더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빈번히 나타나는 동시에 모든 사람에 나타나지는 않고 단지 세대를 건너뛰기도 하며 랜덤하게 나타나는 혼란스러움 때문에, 마서즈 비니어드의 주민들은 결국 청각장애가 있든 없든 그냥 일괄적으로 수어를 배우게 된다. 그렇게 섬의 모든 사람이 수어를 할 수 있게 되자, 청각장애는 더 이상 청각장애가 아닌 ‘귀가 안 들리는 것’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수어가 가능한 환경 위에서는, 귀가 안 들린다(Deaf)는 것이 그냥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이지 장애(Handicap)을 초래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장애의 본질을 이론의학적으로 완전한 인간 모델에서 어딘가 손상을 입은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에 필요한 기능의 어려움으로 정의하며 그 기능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 요구되고 충족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장애의 문제는 단지 ‘의료적 모델’에서 벗어나 ‘사회적 모델’로 확장되게 된다. 동시에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문제를 논할 때에, 대상의 시각적 현저성에 관습적 사고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전인적 삶을 위해 대상체계 뿐만 아니라 구조체계와 사회적 맥락과 공공적 기획에 대해서도 함께 고뇌하는 길인 것이다. 


물론 장애를 아예 규정하지 않아야 한다거나 진단 행위 자체를 악행으로 간주하는 포스트모던 관점을 실제 보건사회정책에 채택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통합적인 관점이 필요한 것이지, 어느 한 관점이 가지는 장점이나 단점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마치 푸코주의로 대표될 수 있는 맥락 만능적 접근방식은 결국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현장에서 거부될 수밖에 없다. 낙인 때문에 장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얻은 사람이 낙인에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통일된 설명체계에 반영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어 왔다. WHO는 ICIDH-2를 개정한 ICF(국제 기능·장애·건강 분류, 2001)을 내놓으면서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장애 진단 및 분류 기준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ICF는 장애에 대한 개인-손상 관점과 사회-구조 관점 모두를 통합하여, 장애에 대한 개인적인 변동치를 정의하되 사회환경적 특성도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ICF의 기본 목적은 건강 또는 건강과 관련된 상태를 표현하는 체계와 통일된 표준분류를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결국 ICF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건강에 관련된 요소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보편적인 적용이 가능한 틀이라고 할 수 있다. ICF는 과거의 분류와 달리 개인적 장애 및 질병과 상황적 맥락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기능과 장애를 설명하고 있으며, 장애는 개인에게 귀속된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건강상태나 상황적 맥락에 의하여 달라진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김영애 외, 2019 : 11) 


이러한 장애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은, 장애를 넘어서 인간이 처한 모든 조건들과 떠오르는 이슈들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준다. 시각정보와 반성되지 않은 관습적 편견이 제공하는 거짓된 직관적 선명성에만 홀려서 개인 ‘에게’ 일어나는 문제를 개인 ‘의’ 문제로 치부하여 아픈 사람들을 고통과 결핍에 시달리게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해서 아예 건강과 육체적 정상성이 주는 가능성을 버리고 ‘그러므로 고혈압도, 당뇨도, 흡연도, 알코올 중독도 모두 사회적 낙인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므로 의료는 권력자의 지배행위에 불과하니 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라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중간의 좁은 길로 가야 한다. 어렵더라도 균형을 잘 잡고 사려깊은 진단과 치료를 시도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결국 인간 존재를 통합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객관화된 설명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당사자의 니즈를 가장 잘 충족하는 최적화된 서비스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5-21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Thiago Barlett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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