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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21. 2021

'보험으로서의 인권'을 넘어서

인간 기본권 실현의 요구는 위험 분담 필요성의 협박이 아니다

www.beminor.com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20년을 넘겼다. 2001년 장애인 부부가 시흥시 오이도역에서 장애인리프트 이용 도중 추락해 한 분이 사망하고 한 분이 중상해를 입는 참사가 있고, 이를 계기로 ‘장애인이동권연대’가 결성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휠체어를 타고 버스나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의 저상버스 도입률은 28.4%로 전체 버스의 1/3에 미치지 않는다. 저상버스의 배치를 의무로 지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자치단체와 운수회사의 재량에만 맡긴 구조이기 때문이다.(이가연, 2021-01-22, 링크) 또한 저상버스의 대부분이 시내버스에 집중되어 있어, 고속버스 · 광역버스 · 마을버스 등 시외버스 이외의 대중교통은 휠체어로 탑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택시가 버스를 대체할 수도 없다.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2020 개정)에서 장애인콜택시와 같은 ‘특별교통수단’을 규정해 놓기는 했으나, 중앙정부의 일괄적인 관리감독 책임을 명시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시 · 군 · 구 조례에 따라 운영방침이 모두 달라서 시 · 군 · 구 각 지역의 경계를 넘을 때마다 택시를 갈아타야 하는 기괴한 운영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경기도에서 경기도로 이동할 때에도 장애인콜택시를 4번 갈아타야 한다.(ibid.) 또한 그러한 장애인콜택시의 운행대수를 ‘보행상의 장애인으로서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장애등급제가 폐지되기 전에는 1급과 2급 장애인) 150명당 1대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박성용, 2020-10-21, 링크), 차량에 탑승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대기시간은 평균 2시간 이상이고 교통사정에 따라서는 4~5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휠체어에 탑승한 상태로는 한국 버스의 71%이상을 타지 못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고 장애인콜택시도 턱없이 부족해서 이동권을 극히 제한하고 특정한 경로 이동은 불가능하게 만들어 둔 것이다. 당연히 헌법 위반일 뿐만 아니라, 『장애인복지법』(2019 개정), 『국가인권위원회법』(2001), 『한국장애인인권헌장』(1998) 등을 골고루 위반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이동권을 중앙정부가 직접 책임지게 하고, 저상버스 배치를 의무화하고, 장애인특별교통수단 지역간 차별을 없애며, 대중교통에 휠체어 리프트 · 엘리베이터를 전부 설치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고 있다.(방진혁, 2021-02-24, 링크)


2021년 2월 10일 오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열차를 타고 내리는 방식으로 장애인이동권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때 4호선을 탑승했던 비장애인들과 장애인의 만남이, 비장애인이 교통에 있어서 직접적인 지장을 체험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문애린 서울장차연 대표는 “일반 시민들은 한두 시간 지연되면 난리가 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일상”이라며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다치거나 사망 걱정을 하면서 이동한다”고 말했다.”(ibid.) 나는 장애인이동권 시위를 생각하며, 이 시위의 형태가 비장애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이해될지 생각한다.


내가 예상하기에, 그리고 바라건대, 오늘날의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정부의 장애인 이동권 등 기본권 보장(혹은 복지서비스) 수준이 이대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장애인 복지 확충에 찬성하고 저상버스와 장애인특별교통수단 확대배치에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심층적으로는 어떤가? 나는 한국 시민사회의 전통적인 복지를 바라보는 틀에 의심을 거둘 수 없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회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복지 설득의 논리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도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논리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전히 사회복지와 공공부조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나도’ 혹은 ‘당신도’를 강조한다. “당신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라거나 “나 역시도 이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 다음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미리미리 제도를 정비해 놓아야 합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물론 결정적인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는 주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보험 상품에 가입하고 정부의 공공 4대보험에 가입하는 까닭과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를 일종의 가장 믿을만한 보험회사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내가 언제라도 당할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해서, 이를테면 보험계리학적으로 리스크와 비용의 균형 지점을 계산하고, 그에 맞게 사회에 미리 투자하여, 운 없으면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질병 · 부상 · 장애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정부와 공공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인류의 역사동안 함께 해 온 손해보험의 역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최초의 손해보험은 좁게 보면 14세기 유럽 해상무역 시기에 등장한 해상보험이 시초이나, 넓게 보면 보험계약은 기원전 수천년 전 바빌론 시대부터 모험대차 · 공동해손 등의 개념으로 존재해 왔다.(보험연구원, 2017, 링크 ; 이원정, 2011, 링크) 이후 어마어마한 양의 노동자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일하게 되는 근대화 · 산업화 과정에서, 사회를 안정시키고 수많은 산업재해 사상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 역시도 공공정책 중 하나로 보험을 채택하게 된다. 19세기 독일이 세계 최초로 3대 사회보험(질병보험, 1883 ; 산재보험, 1884 ; 중증요양 및 노인연금, 1889)을 도입한 이후로 – 이는 현대 4대 사회보험 중 3가지를 선취한 어마어마한 업적이다 – 현재 “5개국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국가에서는 어떤 형태든 산재에 대한 보상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산재보험제도가 있는 136개국 중 106국은 사회보험 중 가장 먼저 도입한 보험이 산재보험이다.”(박찬임, 2002, 링크)


아무리 보수적으로 경제적 신자유주의 기조를 취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재해보험은 반드시 도입되어 있다. 누구나 확률적으로 동일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그 비용을 1/n로 분담하여 위험을 헷지한다는 단순하고 강력한 원리에서 출발한 재해보험의 필요성은, 경제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한국어와 영어에 있어서 ‘보험 들다’ 라는 표현과 개념은 일상생활 회화에도 널리 확장되어 쓰이고 된다. 


보험 제도가 가지고 있는 이렇게 강력한 보편적 설득력과 소구력은, 이렇듯 사람들을 ‘각자에게 소속된 위험의 공동 분담’이라는 전형적 논리에 익숙해지게 하였고, 이는 사회적 비용 분담과 관련한 많은 논의에서도 보험에 대한 비유가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오늘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사회복지와 공공부조에 대한 수많은 논의들에서도 보험의 비유는 빠지지 않는다. 인권이나 사회적 분담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도, 그것을 설득하는 데 있어서 나도 언젠가는 다칠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위험이 ‘남의 얘기’가 아님을 알고 지금부터 관심을 가지고 제도적 대비책을 도입하자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단순히 비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이 진실이냐고 묻는다면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의 가장 처절한 사례는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던 독일의 목사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의 시『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1976년 버전)일 것이다.(출처)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매우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실제 논의의 현장에서 상당히 선호될 만한 설득의 옵션임을 인정한다. 마치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처럼 전형적인 극우 미디어에 영향을 받은 채로 ‘나는 공짜 좋아하는 사람 싫어’, ‘빨갱이 싫어’, ‘손해를 본 건 너가 게으른 탓이야’ 라는 식의 반공주의 · 반사회주의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에게, ‘사회적 위험에 다함께 대비하지 않으면 다음 차례 희생자는 당신이 될 겁니다’라고 말해주는 것만큼 확실한 설득력을 가지는 논리는 없다. 게다가 이러한 논리는 역공을 당할 가능성조차 거의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어떤 복지반대론자에게 “만약 당신이 잘못되어서 가난하고 아프게 되었을 때 정부가 당신을 책임지게 하는 법안에 동의하시는 게 좋을 걸요”라고 할 때, 상대방이 당신에게 “그러면 부자가 내야 하는 세금은? 당신이 만약 부자가 되면 어쩔건데?”라고 역공을 걸 수는 없다. 우리는 부자가 될 확률보다 빈자가 될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확률적 설득력을 떠나서라도, 논리적으로도 이는 자명하다. 보험이라는 것 자체가 잘 안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가입하는 것이지 잘 될 가능성을 두고 드는 것이 아니다. 잘 되고 나면 보험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회복지에 대한 이러한 접근이 사회복지의 근본적인 가치와 개념에 대하여, 아주 내재적이고 근본적인 기저 합의의 수준에서부터 ‘부식성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논의는 인권이라는 개념을 일종의 내가 속한 집단의 위험부담을 분담하는 공제조합 멤버쉽 정도의 역할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는 인권이라는 개념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며 헌법의 적용을 받으면서 살고, 인권을 이유로 들어 세상의 이런저런 부분이 개선되어야 함을 촉구하지만 정작 인권이란 개념 그 자체에 대하여서는 일종의 도구처럼 취급한다. 범죄자는 가질 자격이 없으니 인권을 빼앗아야 하고,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인의 인권을 지켜 줘야 하고, ‘내 아이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 인권을 지켜 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논의의 습관들이, 인권의 절대적 위치를 지속적으로 행위자(나 자신)의 이익과 연관짓거나 인권을 이익이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지불하는 반대급부처럼 취급하는 방식으로 그 위상과 절대성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인권은 ‘나’나 ‘우리’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개념으로 존재하는가? 인권 나의 이익 관심과 연관된 조건 하에서만 준수될 가치가 발생하는가? 즉, 우리는 인권을 위해 부담금이나 용역을 지불할 때에, 그것이 타인의 인권을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의무이기 때문에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인권을 지킨다’는 집합에 포함되는 행위를 하였을 때 미래에 나에게 돌아올 잠재적인 효능을 위하여 지불하는 것인가? 나는 오늘날 많은 인권에 대한 담론들이 이러한 손해보험 수준의 보험증권의 개념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동물권 등과 같은 확장되어가는 권리론이 얼마나 찬밥 대접을 받고 있고, 심지어는 경멸과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해볼 때 여실히 드러난다. ‘인권’의 위태로움은 인간 이외의 다른 권리에 대한 기초적인 논의가 공론장에서 받는 대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권리라는 것의 특성상 누군가가 보호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없는 약한 것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권리를 인정하지 아니하기로 마음먹고 비웃고 무시하자면 얼마든지 그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리 담론의 지평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종류는 그나마 ‘인권’ 즉 ‘인간의 권리’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인간은 그나마 가장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하여서도 인간이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비슷한 능력이 있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소리지를 수 있고 혼자서 혹은 집단적으로 저항하거나 보복할 수도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이 다른 인간에 대해 느끼는 기초적인 동질감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지지받고 보호받고 있으며 또한 인권과 헌법에 의해서도 보장받고 심지어 극한의 상황에서라도 우리는 대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슬기와 행동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심지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인간으로서 죽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있어 ‘동물권’은 어떤가? 오늘날 동물권의 논의는 비거니즘(채식주의)이나 에코이즘(녹색주의)를 제외한 주류세계에서 그야말로 육포처럼 안주거리로 씹히고 조롱당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서 장애를 얻을 가능성은 있어도, 동물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동물의 이야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남의 일이다. 여기서 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을 인용하고 싶다. 



"The greatness of a nation and its moral progress can be judged by the way its animals are treated.”

한 나라의 위대함과 윤리적 성숙은 그들이 동물을 어떻게 대접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간디의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환경주의나 동물권 옹호 내지는 채식주의에 대한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나와 관련없는 타자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관한 것이다. 인간은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고 심지어 불이익도 주지 않는 완전한 ‘남’이라는 존재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외면할수록 마음이 편해지고 착취하거나 고통을 줄수록 이익이 생기는 무장해제된 노예나 범죄자나 가출청소년이나 난민이나 만성질환자나 기초생활수급권자 같은 완전한 타자에 대해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은 그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동물에게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착취하고 괴롭히기 가장 쉽고 보복당할 일이 아예 없는 동물이야말로, 인간이 그 비슷한 다른 살아있는 존재를 대하는 버릇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그 순간 무심코 드러나는 버릇이 바로 타자와 약자의 권리에 대한 태도이다.


권리를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의무이자 원칙’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권리를 보험으로 인식하는 한, 우리는 내가 될 가능성이 없는 모든 불리한 상태에 대한 관심을 끊어도 괜찮게 된다. 그것은 어떤 의식 있는 존재가 극도의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한 사회적 원칙체계인 권리라는 논의 그 자체에 대한 중대한 담론적 희석을 불러일으킨다. 권리라는 개념이 ‘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나의 보험적 필요성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동물이 되고 동물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아무런 보호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나는 소나 돼지가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소나 돼지의 생애주기나 사육 환경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아도 될 것인가? 나는 지금 단순히 동물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 윤리의 근본적 쎗팅과 도덕적 태도의 원칙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런 존재가 될 가능성’이 없다면 ‘내가 그런 존재를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같은 층위에서, 내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이 없거나 희박하면, 장애인의 이동할 권리는 후순위가 되어도 되는가?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여성이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어떤 개차반의 대우를 받든지 관심두지 않고 남자들의 ‘여자 쉽게 사귈 권리’에만 몰두해도 괜찮은가? 서서히 바람직한 수준으로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의 시민권과 사회권 회복 운동을 짓밟아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비교우위를 지켜내기 위해 페미니즘을 악마화(demonize)하고 낙인찍는(stigmatize) 안티페미니즘에 열광해도 괜찮은가? 


아시안은 이미 한 번 태어났기 때문에 아프리칸이 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아프리칸이 북미나 다른 대륙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든지 상관하지 않아도 되는가? 내가 원자력발전소나 폐기물매립지나 송전탑 근처로 이사갈 일이 없기 때문에, 내가 젠트리피케이션 당하는 골목에 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지방 소도시에 살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재개발로 푼돈을 받고 쫓겨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는 발달장애인이 없기 때문에, 우리 집에는 딸래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트랜스젠더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일용직 노가다를 뛸 일은 없기 때문에, 간호사나 간호조무사나 소방관이나 요양보호사를 안 할 것이기 때문에, 비바람 속에서 오토바이로 닭을 배달할 일은 없기 때문에, 정말로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없을 만큼 개인적 대비를 잘 해놓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지 내 알 바 아닌가? 나는 남이 될 일이 없으니까 남의 문제에 관심을 꺼도 되는가? 나는 남들에 소속될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권리와 우리의 인권만 챙기면 되는가? 


나는 동물권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단순히 동물을 보호하자거나 고기 먹지 말자는 얘기로 끝맺으려고 이렇게 다층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다. 인간의 태도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동물에게 잔인한 자가, 동물처럼 무력하고 나랑 상관없는 다른 인간에게 친절하리라는 것은 전혀 말도 안 되는 기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다른 ‘어찌된들 상관없는’ 인간들을 두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인간에게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인권이란 무엇인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인권은 타인에 대한 나의 의무라는 것이며 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리는, 오직 사회학적 필요성과 인간의 양심에 의해 셋팅된 ‘권리’라는 문화적 구성개념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비용을 지불하고 의무를 부담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윤리적 지불대상이다. 그렇다고 권리는 믿음이나 초월적 명령 같은 것도 아니다. 인권과 인권을 지킬 의무에 대해서 너무 믿음에 의존하는 신학적 태도로 접근해서 논의를 그르친 사람이 바로 위대한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이러한 인간의 의무적 선행을 도덕법칙과 정언명령의 개념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칸트는 영미철학이나 체험주의 철학의 비판처럼 그 궁극적인 정당성을 공유 불가능한 선험적 사변론과 손에 쥘 수도 없는 형식주의에서 찾음으로써 그 가치를 납득가능한 설득의 형태로 빚어내고 공유가능한 지평에 올려놓는 데에 실패했다. 


물론, 칸트가 이렇게 설득력 없는 장황하고 자폐적인 보편주의와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고 해서 포스트모던 철학이 이러한 작업에 성공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공적인 설득의 장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서 솟구치는 정동의 지평에 갇혀서 줄창 펑펑 우는 데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모더니즘이 논리적으로 자기도취적인 자폐였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감각적으로 자기되풀이적인 자폐였다. 그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휘몰아치는 감각을 직면하는 것과 사막처럼 건조한 보편법칙 수립의 기획 사이에서 어느 하나에 극단적으로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둘 모두가 인간이라는 하나의 유기체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고 통합적 설명을 꾸준히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은 어떤 기획에 있는가? 혹시 그것은 근대주의가 남긴 ‘짓다 만 아파트’인가? 나는 그것이 결코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인권이야말로 인류의 보편적인 만남의 지평이자 사회적 희망임을 주장한다. 언뜻보기에 인권 그리고 권리의 개념은 단순히 의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권리 개념의 정당성과 가치는 칸트가 설파한 것처럼 어떤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안 믿으면 그만인) 명령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권은 거의 모든 인류가 뼈저리게 느끼는 어떤 ‘체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다른 인간의 –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하고 느끼는 존재들의 – 갈증과 고통에 반응하는, 인간의 압도적으로 보편적인 ‘함께아픔의 체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 아픔의 체험이, 타인이 어떤 조치를 나에게 요구할 청구권을 타인에게 자발적으로 부여하고 또한 서로에게 그것의 보장을 약속하게 하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장 끔찍했던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인권 제정의 열망이 사회적으로 가장 강하게 표출되고 많은 인권 합의로 이어졌다는 점은, 인권이 일련의 보편적이고 정서적인 쇼크로부터 유래했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권이 전후세대만 느낄 수 있었던 초신성 폭발 장면 같은 것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밤하늘을 계속 응시하고 있을 때 처음에는 없는 줄 알았던 별빛이 점차 드러나고 이윽고 밝게 빛나듯이, 자비로운 마음으로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람은 누구나 동일한 느낌에 접속할 수 있다. 그것은 무슨 영적인 네트워크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거의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는 동등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오히려 인간끼리의 보편성을 타인을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는 관찰이나 끝없는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보편성은 명상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내면을 살펴볼 때, 나의 마음 아래에 잠겨 있었던 타인과 동일한 성질들이 말갛게 드러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이러한 공감 능력과 친사회적 추동(drive)의 지평에서, 타자의 고통이 주는 충격은 이익관심 고려의 지평을 간단히 넘어선다. 인간의 친사회적 두뇌에 찢어지는 고통을 유발하는 ‘함께아픔의 지평’을 느끼기 시작한 인간에게, 인권 개념은 더 이상은 손해보험 공제조합이나 상호불가침조약을 위한 것이라든가, 신비주의적인 태도로 인간성 찬양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권 개념은 이 상호간의 고통 – 타인의 아픔을 내가 느끼는 것과 그럼으로써 내가 아픔을 내가 느끼는 것이라는 이중의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세운 ‘원칙’이라는 어떤 특유한 형태의 사회적 대책이다. 


인간이 분명하게 느끼는 함께아픔의 체험과 그 체험의 압도적인 보편성이 한 사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군중 전체를 움직였고, 조건부 대책이나 상대적 대책이 아니라 절대적 대책을 강구하게 하였고, 또한 단기적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이 아니라 항구적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이다. 바로 그 맥락에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제작되었다. 선배 인간들은 인권 개념의 세부 조항들과 사용 규칙에 후대 인간들이 다시는 인류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놓았다. 그것이 인권의 원칙으로성의 측면과 절대성이라는 성질이다. 친사회성이라는 대다수의 염원과 현실의 까다로운 제약들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모든 쉬운 길을 벗어난 좁은 길인 ‘인간 존재에 대한 일반화되고 절대화된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원칙으로서의 인권’으로 빚어진 것이다. 바로 그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원칙으로서 인권의 문법이 탄생하는 순간이, 역사에서 허구의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총체로서의 ‘지성’으로 완전히 기능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인권이라는 원칙에는 여전히 세속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인권의 개념에는 어느정도는 정말로 보험적인 성격도 있고 어느정도 믿음의 성격도 있으며 어느정도 법학적인 설계도 있고 어느정도 정치적인 꾀함도 있고 어느정도 미래에 대한 기투(企投)의 성격도 있고 어느정도 실용주의적인 쓸모도 있고 어느정도 미학적인 숭고함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처럼 다층적인 ‘인권’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다방면에서 적절한 가치 밸런스를 가지고, 원래 셋팅의 목표인 ‘고통받는 존재가 없게 하라’는 옹호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대변하고, 또한 강력한 정치사회적 실용성을 가진 상태로, 다만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준수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권은 우리 인간들이 공유하는 독특한 고유 자아의 표현 방식이며, 인권유린의 폐허를 겪고 살아남은 선배 세대와 오늘날 여전히 부분적인 인권유린을 겪고 있는 우리 세대를 이어주는 인간성의 유산이자, 의무의 형태로 존재하는 삶의 조건이며, 권리의 형태로 존재하는 정체성이다. 그것은 유용하기도 하고 심지어 보험의 효과도 있지만, 유용하지 않고 보험의 효과마저 없을지라도 지켜내야 하는 모국어나 노랫말과 같은 겨레의 문화이다. 이 겨레의 한 결에서 인류는 하나가 되는 것이고, 이 공통성으로 쌓아올린 평화를 통하여 타인으로부터 전쟁 없이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한다. 우리는 인권을 위해 지불해야 한다. 어려운 이웃에게도 책임감 있게 개입하는 인간적인 하루를 살아야 한다. 인간인 한, 인권에 관련된 사건들이 우리 각자에게도 일정하게 책임 있는 사건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제도 우리 나라에 책임이 있고, 즉 나라들은 서로에게 책임이 있고, 다른 집단과 다른 개인의 문제도 우리 집단과 나에게 책임이 있고, 즉 각각의 집단과 개인이 서로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이웃들이 실시간으로 고통받는 문제의 해결에 직면하는 것이다. 


2016년처럼 구의역에서 하청업체 노동자를 지하철에 치여 죽이고는 원청 정규직 셋이 포스트잇 떼러 오게 하거나, 2017년처럼 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부모님들이 특수학교 하나 만들기 위하여 무릎 꿇게 만들거나, 2018년처럼 발전소 설비에 사람이 끼어 죽게 내버려두어서 어머니를 노동운동 투사로 만들거나, 2019년처럼 남자들이 포르노 소비를 장난같이 여겨서는 여자들 자살시키는 디지털성폭력과 n번방 참사를 만들어 놓거나, 2020년처럼 미국 경찰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밟혀 죽고 중국 당국이 민주화 운동가를 모조리 감방에 넣게 내버려두고, 2021년처럼 미얀마의 군사독재 정권이 5.18 광주민주화항쟁 때처럼 시민들을 학살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멋있어보이는 철학책을 기웃거리고 고전명작을 뒤적거리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더 이상 묻지 말라. 아직도 그 한가한 물음이 나올 정도로 정신 못 차렸으면 질문에 답을 찾을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더 현실적이고 더 직접적인 질문과 요구를 해야 한다. 오늘날 모두가 한나 아렌트의 경고처럼 ‘상투적인(banality)’ 무언가에 홀려 있다. 중산층은 좀 더 적은 세금과 좀 더 편한 직장 얘기를 하루종일 한다. 물려받은 것 없는 청년층은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뭔가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자기들만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어들어가서 자신보다 약자인 모든 이웃들을 댓글로 두들겨패고 있다. 


한 줌도 안 되는 진보 운동가와 진보정당원은 그 댓글들이 정치운동의 실체라고 여기고 온종일 거기에 카운터펀치를 먹이고 살다가 열 명이 모이면 열 개의 노선투쟁을 벌이고 있다. 부유층은 부동산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보이지도 않는 세계에서 저임금 비숙련노동자를 활용하며 살고 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데에 핵심적인 법들은 몇 년째 국회에서 계류중이다. 아무도 연대하지 않는 당사자들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시위하다가 경찰에 잡혀가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이냐고? 이것이 인간이다.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시체 더미들을 똑바로 쳐다보고, 가서 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일을 해라. 우리 시대의 잔혹한 인권 문제들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공동의 책임이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또한 리스크매니징 관점에서 이익이 되든 안 되든 그것은 우리가 인간답게 행동하는 것과 상관이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성을 발휘하고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한 갈래의 좁은 길뿐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5-21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Aung Nyein Ch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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