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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May 23. 2021

장애의 경제학적
파급효과를 제거하기 위하여

장애기본소득을 통한 유동성 공급으로 거시소득격차를 상쇄해야 한다

오늘날 장애에 대한 선진화된 논의들은, 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장애가 단지 육체적 손상에 따라 어쩔 수 없이발생하는 필연적 결과라는 단순한 인식에서 벗어나, 한 사회가 몸을 다친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장애를 발생시킨다는 보다 구조적이고 체계이론적인 인식으로까지 발전했다. 이것은 장애를 적어도 두 영역으로 나누었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하나는 개인에게 속할 수밖에 없는 영구적 손상을 의미하는 일차적인 장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이론적으로 충분히 개선이 가능한데도 방치되어 있는 사회가 초래하는 이차적 장애의 영역이다. 


일차적 장애(혹은 ‘재활치료의 대상으로서의 장애’)는 인간의 육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손상을 극복하고 개개인을 재활하고 강화하는 데 힘쓰는 등 개별화된 의학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이차적 장애 영역은, 사회의 여러 제도와 물리적인 시설 · 설비 · 장치 · 물건들을 구성하는 인간의 통제와 기획에 달려 있기 때문에 – 즉 자유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 그 사회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불리하고 불편한 제도나 환경이 조성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생성된다. 여기에는 사회에서 (촉진되거나 방치되는 방식으로) ‘구성된’ 사고 또는 질병 때문에 발생한 장애에 대한 책임이 포함된다. 대부분의 장애는 사회라는 특정한 구성 안에서, 사회와의 작용 속에서 후천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장애에 있어서 사고에 의하여서는 32.1%, 질환에 의하여서는 56%로서 후천적 원인이 88.1%이다.(홍진수, 2018.04.19, 링크) 2018년 보건복지부에 새로 등록된 장애인구는 40,239명인데,(한국장애인고용공단 고용개발원, 한 눈에 보는 2019 장애인 통계, 링크) 같은해 산업재해로 2,100여명이 사망하고 9만여명이 부상하였고 이 가운데 3만 3천여명이 장애를 얻었다는 점에서 미뤄볼 수 있듯이 (고용노동부, 2018년 산업재해현황분석, 링크) 장애는 오직 사회적 안전망 구성의 결과가 개인에게 이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모든 장애는 사회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동시에 사회에 극복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사회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 한, 사회는 장애의 원인부터 결과까지에 책임을 가지게 된다. 재활치료전문가와 환자가 몸을 움직여서 참여하는 재활치료 세션이라는 매우 한정적인 영역을 제외하면 장애는 사회에 그 결정권이 있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애를 단지 개인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발전시켜서, 장애의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여러가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장애에 대한 사회적 개입의 패러다임은 빈민구제의 관점이었다. 빈곤한 사람들은 장애를 완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각종 약값, 장비비, 장애인보조기구 등 비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비용을 정부에서 보조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의로운 사회(그리고 그들의 정부)가 가지는 매우 핵심적인 기능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빈민 구제로서의 복지’ 패러다임은 한 가지 중요한 통찰을 빠트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개입이라는 것을 하는 목적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굶어죽지 않게 하거나 생활고를 간신히 면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반쪽짜리 인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회적 개입의 또 다른 목적, 혹은 더 근본적인 목적과 철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회의 누군가는 반드시 확률적으로 반드시 처하게 되는 불의의 통계적 · 경제학적 변동치 그 자체를 상쇄하기 위해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운이라는 변수를 상쇄하여 변동성을 통제하는 경제질서 안정화 정책으로서의 복지’라고 표현한다.


즉, 그 특정한 불의의 사고나 환경이 무엇이든 간에, 예를 들어서 가족이 이혼을 했다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거나 장애를 얻었다거나 범죄를 당했다거나 비교적 제한된 환경 – 가령 대도시에 비하여 낙후된 소도시 등에서 태어났나거나 할 때, 그것은 개인의 노력이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운이 나빠서 당한 불리함인 것이며, 그런 불운이 존재하는 한 그것에서 면제된 행운을 누리는 사람들도 대칭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가 순수한 노력과 기여에 의해 보상받을 수 있도록 서로의 운에 의한 변동성을 방지하고 운이 좋은 사람들도 나의 운을 대신 가져간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의 손실분을 보전해주기 위하여 소득을 이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운이라는 변수를 상쇄하여 변동성을 통제하는 경제질서 안정화 정책으로서의 복지’는 누구나 운이 없어서 당할 수 있는 일에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손해보험으로서의 사회보장), 사회 때문에 구성된 위험이 개인에게 전가된 일에 공동으로 보상하는(손해보상으로서의 사회보장)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더욱 정의롭고 (요즘 사람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단어인) 공정한 사회로의 발달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2021년 오늘날 한국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남찬섭 동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참여연대 기고문 「2021년도 보건복지 분야 예산안 분석 : 장애인복지 분야」를 살펴보자. 2021년도 올해의 보건복지부 소관 장애인정책 지출예산은 3조 6,662억 원이다. 이것의 절대적 액수를 살펴보기 전에 상대적 증감 추이를 먼저 살펴보자면, 장애인정책 예산 증감률은 2019년은 +23.0%, 2020년 +19.9%, 2021년 +11.9%로 문재인 정부 구성 이후로 엄청난 증가폭을 보여주었다. 2012년 복지부 총지출 예산의 2.6%였던 장애인정책 예산이 2021년 4.1%로 증가했다는 점에서,(남찬섭, 2021, 링크) 공공 장애인 정책에 늘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던 후진적인 관습에서 입법부와 행정부가 조금씩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 자체가 긍정적으로 셋팅되었다는 점은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한국 장애인정책 자체가 중앙정부의 강력한 서비스 책임과 책무성 하에 운영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할 수는 없다. 일례로, 한국에서 장애인관련 주거지원 서비스는 중앙정부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운영하는 상태라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민간주체에 그 기능을 위탁하고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 제22조에 따르면 복지시설 운영주체는 중앙정부/지자체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법의 1983년 일부개정을 통해 이것이 허가받은 비영리법인으로 확대되고, 동법의 1992년 전부개정을 통해 그 외의 주체도 허가를 받으면 사회복지시설을 설치 · 운영 가능하게 하였고, 동법의 1997년 일부개정을 통해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고 심지어 중앙정부/지자체 시설을 사회복지 또는 비영리법인에게 위탁운영할 수 있게 규제를 완화하였다. 즉, 민간시설에 있어서 허가를 신고로 완화하고 국영시설에 있어서 민간 위탁 운영을 확대하는 것인데, 이러한 복지정책의 민영화는 지속적인 사회복지사 등의 임금 등 처우 문제와 서비스 품질의 하락과 Q/C 불능으로 나타나며(정수홍, 2013, 링크), ‘제도적 차원에서의 서비스 표준(Care Standard)’이 만들어질 수 없게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임성만, 2006, 링크) 심지어 정부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미신고시설 문제에 미적지근한 대처를 하고 있음은, 장애인복지 문제에 대한 정부의 제한적 접근방식이 쉽게 바뀌지는 않음을 보여준다.(웰페어이슈, 2020-07-07, 링크)


이처럼 장애인 복지 문제의 접근방식을, 단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One byOne’의 방식으로만 생각하고 심지어 그것을 돈 들어가는 문제로 생각하여 최대한 민영화하는 것은, 운에 따른 강력한 경제적 변동치의 거시적인 상쇄를 추구하는 이른바 ‘통계학적 사회정의’ 추구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물론 현행 『장애인복지법』의 소득보장제도인 장애수당 · 장애인연금, NPS의 장애연금 등은 나름대로의 법적인 의의가 있고(그러나 16개 OECD 회원국에서 운용하고 있는 장애인 최저소득보장액의 1/8에 불과하다. 윤상용, 2013, 링크), 장애인 저소득층에게 특화된 바우처나 보조장비제작비를 제공하는 나름의 제도적 노력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주의적인 접근’에 불과하다. (나는 이것을 선별적 접근이라고는 표현하지는 않는다. 모든 장애인 정책은 장애인에 특화된 정책이라는 점에서 선별적이기 때문) 하지만 앞서 언급한 ‘운이라는 변수를 상쇄하여 변동성을 통제하는 경제질서 안정화 정책으로서의 복지’ 혹은 ‘통계학적 사회정의’의 필요성을 생각할 때, 이렇게 빈곤가구에 대하여 완전한 생계문제를 간신히 막는 정도의 최소주의 접근은 역부족이다. 장애는 모든 사람이 노출된 모든 사람에 대한 리스크이며 사회 문제이다. 단지 저소득층이나 일용직 · 생산직 노동자들처럼 특정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더 불평등하게 전가되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장애의 위험은 아무리 전가되더라도 절대 0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몇 개의 장애를 얻을 위험에 노출되고, 그것은 모두에게 중등도 이상의 손실을 초래한다. 소득 감소나 경력단절과 같은 장애의 부정적인 효과가 단지 저소득층이나 장애인시설 수용자에게만 나타나는가? 그렇지 않다. 장애는 모든 계층의 모든 사람에게 일괄적인 부정적 소득 효과를 나타낸다. 만약에 중산층이 장애를 얻어서 자신의 재산 일부를 처분하여 ‘장애 비용’을 감당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돈 쓴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사회적으로 조직하여 대항하려는 것이, 장애가 일으키는 빈곤인지 아니면 장애가 일으키는 비용 그 자체인지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모두에게 리스크가 있고 모두에게 일정한 손실을 강요하는 통계적인 어떤 상태. 그것이 경제학적/소득정책적 지평에서의 장애이다. 그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모두가 비용을 분담하고 해당하는 모두에게 지급되는 보편적인 소득보전장치, 즉, ‘장애인 기본소득’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장애정책이라는 선별주의 안의 보편주의 접근방식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복지정책에 관한 논의의 흐름은 어떠한가? 전통적인 시장만능주의적 감세주의자들의 ‘선별적 복지론’을 앞세운 최소복지정책 및 과세 축소에 대한 열망과, ‘All or Nothing’이라는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사로잡혀 전 인구를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 지급이라는 이루어질 수도 없고 이루어져도 인플레이션의 위험으로 경제를 몰아넣게 되는 기본소득론자들의 갈망이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는 두 입장을 통합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적어도 최소한도의 장애 위험에 노출되는 한, 장애인 장애기본소득을 통한 유동성 공급으로 모든 장애인구가 노출되는 경제학적 위협인 거시소득격차를 완화하고 빈곤과 장애를 함께 겪는 가구에는 더욱 강력한 맞춤형 복지서비스를 공급해야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5-23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Sara Kurfeß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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