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루 May 26. 2021

노동계약대논쟁
- The Great Belief -

노동계약을 바라보는 두 가지 거대한 믿음에 관한 에세이

인간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신 혹은 타인의 노동에 의존한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태도는 보편적이지 않다. 노동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노동에서 별로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노동에 별 의미가 없지만 그렇다고 놀 수는 없으니까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있고, 단지 먹고살아야 하기에 억지로 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는 노동을 찬양한다. 다른 누군가는 노동이 가급적이면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돈 받고 하는 놀이에 불과하고,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책무, 누군가에게는 자아 실현이며,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고,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도 대단히 환영할 만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지면에 미처 옮기지 못한 천차만별의 노동에 대한 태도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갖든 상관없이 죽음은 우리를 반드시 찾아오는 것과 같이, 노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모든 사람은 노동에 연루된 삶을 산다. 노동에 대한 개인적인 입장의 차이들을 제외하면, 인류에게 노동이란 무엇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다행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불운하게도 노동이 싫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모든 사람은 노동행위를 계속 추구하는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질문이 바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 근본적인 층위의 질문에 답할 때 노동의 본질이 드러난다. 노동이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노동을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노동은 근본적으로 자유인가? 아니면 사실상 강제적으로 부과된 행위인가?


“노동은 자유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노동에 연관된 엄청나게 많은 논란을 정리해나갈 수 있는 최초의 기준이 된다. 노동이 자유라면 노동에 관련한 엄청나게 많은 규제들이 쓸모없어지거나 도리어 자유의 박탈이 될 것이고, 노동이 자유가 아니라면 노동은 마땅히 공적인 보호와 개입 정책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은 상품인가? 노동을 마음대로 사고팔아도 괜찮은가? 노동에 있어서 사용자와 근로자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노동환경의 문제점을 개선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유로운 개인의 계약은 존재하는가? 노동정책을 통해 정부가 노동현장에 개입하는 것이 올바른가? 우리는 사회복지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개입해도 되는가? 임금 및 노동관계정책을 통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올바른가? 권력형 성폭력의 개념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그 자리에서 퇴사의견을 말하지 않은 피해자 잘못인가? 산업재해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산업재해의 위험은 개인이 노동계약을 통해 작업장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의무를 임금을 반대급부로 하여 자유계약에 의하여 포괄적으로 승계하는가? 아니면 산업재해의 위험은 누구에게도 이전 불가능한 사업장 내에 붙박이된 위험이며 그 위험을 그곳에 필연적으로 오게 될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불법적 전가 행위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아마 여러분은 나름대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정답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단지 정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정답이 제안되게 된 풀이과정을 듣고 싶어서 묻는 것이다. 노동이 단순히 자유이든, 아니면 절대로 자유가 아니든, 자유처럼 보이는 자유아님이든, 자유아닌듯 보이는 자유이든, 우리가 노동이라는 개념에 대입하고 있는 이 ‘자유’ 개념에 대한 논의는 본디 어디서 유래했는가? 내가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관점은, 그것이 바로 정치경제 개념으로서의 ‘자유’의 반성되지 않은 복사본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의 자유 역시 아예 원점에서 다시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 혹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쌍둥이 개념은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와 대부분의 인류의 표준과 같은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봉건국이나 왕국으로의 회귀를 희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나 극우 군국주의자와 같은 ‘사고사례’들을 제외하면, 오늘날 적으로 겉으로는 아무도 자유의 가치와 민주주의 원칙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한 원칙을 부분적으로 우회하면서(희생시키면서) 공공선을 빠르게 달성하려 시도했던 소련은 내 · 외부의 강력한 반발을 만나 해체되었다. 중국과 베트남 등은 해체되는 것보다 더 문제가 되는 방식으로 변절했는데, 그것은 정치적 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추구하며 신자유주의의 새식구가 된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보편적으로 나타난 봉건주의/공산주의 경제체제의 자유주의 경제체제로의 이행은,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도발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 자유-민주주의의 항구적 승리로까지 해석될 여지를 주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주의는 바로 그 담론이 통상적인 수준에서 유통되기 때문에 상당한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왜곡된 이해와 용법은 대체적으로 논리학적 오류의 한 유형인 ‘정의에 의한 존재 강요의 오류’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정상국가들이 – 혹은 한국이 – 정의상 ‘자유주의’를 채택한다 해서 그 자유가 완전하고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라는 믿는 것은, 실제로 자유의 행사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대다수 사람의 삶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이다. 정치-경제 측면에서 자유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전혀 ‘자유’의 사전적 정의를 필연적으로 반영한다고 말할 수 없는 매우 임의적인 개념임을 (혹은 신앙 수준의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공산주의가 실제 경제체제상에서는 국가자본주의로 나타났던 것과 같은 현실공산주의 나라들의 개념-실재간 괴리 현상과 비슷하다. 우리가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 자유의 개념은 실제 삶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모든 시민은 자유를 소유하였으나 막상 그 자유를 돈이 없으면 아무데도 사용하지 못한다. 마치 모든 생산수단을 공공이 소유하였으나 막상 그 공공이 생산수단의 결실을 누리지 못했던 ‘공산 없는 공산주의’ 소련처럼, 오늘날 한국과 같은 1세계 국가들도 ‘자유 없는 자유주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돈이 없으면 어디든 가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몸을 쉬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마음을 편하게 쉬지 못하고, 돈이 없으면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참여하더라도 돈이 있는 사람들의 실력 행사에 압도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자유국가’에서 정말로 자유롭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통장과 통장 간에 송금할 자유, 트위터에 글 올릴 자유, 1인시위를 할 자유 정도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쓸모가 없다. 없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다고 해서 쓸 데가 없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한국에서의 삶과 노동은 자유로운가? 강력한 임금격차와 노동조건격차로 인해 1차노동시장과 2차노동시장이 나뉘어지고, 강력한 학벌주의 등으로 외부노동시장과 내부노동시장이 나뉘어지며, 부동산세 · 소득세 · 법인세 등 직접세율이 너무 낮아서 공공분야 재원이 항상 부족하고, 3D업종 종사자들이 손목이 잘리든 허리가 부러지든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 공공주택 공급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모든 사람이 평생동안 은행에 집값을 갚으며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서민들은 그런 대출을 받을 신용담보조차 마련할 수 없다. 그래 우리는 투표할 자유가 있다. 트위터를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투표와 트위터는 우리를 산업재해로부터 구해주지도 않고, 평생 집값을 갚으며 사는 인생을 면제해주지도 않는다. 이것이 실질적인 자유가 맞는가? 위험하지 않고 인간대접 받는 직업을 갖기 위해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과로와 위험에 시달리면서 기본재인 집의 빚을 갚기 위해 평생 돈을 벌어야 하는 사회적 셋팅이 자유의 모습이 맞는가?


‘실질적인 자유’의 여부가 점검되지 않은, 성찰없는 자유-민주주의 담론 위에서, 노동과 작업장에서의 담론들 역시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 모든 노동은 자유계약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해고는 자유로운 직장의 이동과 재취업의 가능성을 전제한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임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고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회사와 노동자의 자유로운 계약 관계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 노동시장은 정보의 독점과 유통장애물들로 꽉 막혀 있다. 높은 소득을 보장하는 직업으로 들어가는 길은 학벌과 학력으로 차단되어 있고, 학벌과 학력은 입시 점수로 차단되어 있으며, 입시 점수는 부모의 SES(Social Econonic Status) 수준과 완전히 일치한다. 다시 사이클이 되풀이된다. 그 부모는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건 당연히 과거의 학벌과 학력이 반영된 결과이다. 


물론 어떤 증거들도, 교육의 가치에 대한 음모론적인 해석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교육이나 학문이 부르주아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방어장치라고 믿는 것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나는 예전에 한 맑시스트가, 남자와 여자를 이간질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본가들의 분리통치 계략이 바로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을 듣고 까무러친 적이 있었다. 나는 결코 그런 식의 교양없는 음모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백과사전으로 당신의 머리를 쳤다면, 백과사전에 지식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에 당신이 맞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것을 악의를 가지고 휘둘렀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교사 노예’도 있었다. 노예가 귀족보다 많은 걸 알았다고 해서 그들이 그리스를 지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식이 본질적으로 부와 권력을 재생산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부를 재생산하는 경로로 지식을 채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어찌되었든 학벌과 학력이 부를 재생산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누군가 어떤 독점적인 경로로 추가적인 돈을 번다는 것은,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다른 사람이 돈을 덜 벌게 됨을 의미한다. 즉, 노동시장에 대한 학벌과 학력의 개입은 부의 대물림과 함께 단절된 노동시장을 만들어내는 주요 기전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현대인의 노동은 ‘자유주의’라는 공동의 믿음을 무색하게 하는 가치훼손에 직면한다. 그것은 생존에 있어서 강제되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제한된다는 점이다. 물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가리지 않고 노동의 가치가 강조되고 어느정도는 강제되며 심지어는 신성시되기까지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노동이 생산을 창출하고 창출된 생산에 우리가 의존한다는 것을 잘 알고 모든 사람이 가급적이면 노동으로 유도되어야 함을 인정하지만, 모든 사람이 반드시 노동을 선택할지라도 그것이 폭넓게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결정되는것과 학력 · 지역 · 학벌 · 고비용을 요구하는 직업훈련 등으로 상당부분 박탈된 선택지 안에서 결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가 진정한 자유라면 후자는 ‘딱 한 개 남은 선택지를 고를 자유’이다. 그것은 생존을 인질로 잡은 강제노동이다.


물론 나는 자유가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 개념이 헌법에 적혀 있다고 만족하고 치워버리지 말고, 마치 행동과학자들처럼 ‘자유를 구성하는 행위의 목록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조건’을 집요하게 조작적으로 정의해서 측정해 본다면, 자유의 크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태어난 지역의 유리함 순서대로 빠르게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전에 ‘극단적 상거래 가운데 하나인 성매매는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행위인가?’에 관해서 논하였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성노동론? 가능하지. 석사학위 이상 · RIR(소득대비 주택임대료비율) 20% 미만 · 자산 1억원 이상 · 정신질환 및 고액질환 없음 · 원래 직업 있음 · 가족관계 좋고 가족 건강 양호 · 국가전문자격 및 국가기술자격 소지 · 통신비 및 카드연체기록 없고 신용점수 800점 이상인 사람이 성판매 하고자 한다면 그런 건강한 동료 시민의 성노동을 누가 무슨 권리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나 실제 성매매피해자 가운데 저 자원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가진 사람이 있는가?” (서나루,「지방형 가출청소년 일자리마을 구상」, 2021)


돈이면 무엇이든지 사고 팔 수 있고 공짜로는 밥과 주택 같은 기본적인 자원도 얻어다 쓰기 힘든 세상에서, 거리를 떠도는 가출청소년들이 성매매나 범죄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는 만큼의 실질적 자유를 손상당하였다면, 그 반대편에는 기업의 총수나 커다란 돈을 물려받은 금수저 청년들이 정말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중간 정도의 자유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평균을 모두가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서도 심각한 산업재해를 주로 당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문화혜택과 인프라 혜택을 누리지 못한 지방에서 자랐고, 대학을 가지 않았거나 갔더라도 학벌과 학력상 제한적인 혜택만을 제공하는 곳으로 진학했으며, 얼마 되지 않는 진로 가운데 그나마 채용이 가능한 3D업종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약의 자유라던가, 노동자가 자유의사에 따라 위험한 작업환경에 대한 리스크까지 노동계약을 통해 포괄적으로 인수한 것이라든가, 노동자의 임금은 시장가격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된 것이고 싫으면 나가도 된다고 하는 말들은 완전히 악의적인 거짓말이다. 작업장의 불리한 노동조건이나 고용계약, 작업장의 위험 등을 노동자가 자유 의사에 따라 감당하고 감수한 것으로 인정하기 위하여서는, 이 지구상의 모든 노동현장이 그러한 불가피한 결함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한 문제점을 바꿀 방법도 없어야 하며, 원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는 어떤가? 5천원, 5만원, 50만원짜리 안전장비 값을 아끼다가 노동자들이 기계에 찢겨 사망한다. 


이렇게 한 번 고졸 저숙련 노동자가 된 사람들에게, 커리어를 수평이동하거나 상향이동하는 자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유로운 ‘노동계약’ 이었는가? 자유에는 돈이 드는데 그런 열악한 노동조건을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돈이 있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겠는가? 이러한 지점에서, 자유주의 경제학의 ‘노동력상품론’은 당연히 폐기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 경제학은 노동력공급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아, 노동계약을 단지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상품공급-대금공급 맞교환으로만 파악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박진근 외 20명이 집필한 박영사의 『경제학대사전』은 주제어 「노동가치설」에 대한 설명에서 노동력상품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다루고 있다. 


“베네티(C. Benetti)와 카르틀리에(J. Cartelier)는 [이렇게 설명한다.] (…) 일반 상품과는 달리 노동력상품의 소유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판매를 강제당할 뿐이며 판매하지 않을 자유는 없다. 더구나 노동자는 독립적·사적으로 스스로의 노동을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임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은 사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무엇을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선택은 전적으로 자본가들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자본가의 이니셔티브에 의한 착취의 존재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상품론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맑스(K. Marx)의 노동가치설, 아담스미스(A. Smith), 리카도(D. Ricardo), 멜서스(T.R. Malthus) 등 고전학파의 임금생존비설도 이러한 입장과 같다. 맑스는 회사들간의 시장경쟁 심화가 생산단가 절감의 필요성을 초래하고, 회사측은 절감할 수 없는 다른 고정비 대신에 절감이 가능한 임금을 생존에 필수적인 최저수준까지 깎음으로써 임금상승이 – 노동자 투쟁이 아니라면 – 영구히 억제된다고 주장했고, 고전학파는 임금이 노동인구 상승을 초래하여 임금곡선이 완전탄력적이라는 가정하에 노동의 초과공급이 임금을 생존비 수준까지 깎아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임금이론에서 공통적으로 제시되는 통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임금이 산업에서 일차적으로 고려해야 할 상수가 아니라 가장 먼저 조정 가능한 변수로 이해되고, 그래도 되도록 법적으로 허용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가능한 한 바닥까지 깎이는 노동자의 임금은, 현찰로 지불되는 직접임금뿐만이 아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노동자의 임금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위하여 투자해야 하는 다른 안전설비 등 간접임금의 영역(경영학에서는 생산활동의 지원과 관리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인원에 대한 급여만을 ‘간접 노무비’로 표현하고 있으나 편의상 이렇게 표현하겠다) 역시 가장 먼저 삭감된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운 나쁜 사람들을 사실상의 생존을 위해 강제된 3D 노동 · 저임금 노동 · 고위험 노동을 하게끔 몰아넣은 다음, 더 많은 이윤과 생산성을 위해서 그 사람의 안전과 돈을 가장 먼저 빼앗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자유로운 나라인가 아니면 부자유한 나라인가? 거기서 딱 잘라 대답하는 사람이야말로 거짓말쟁이다. 현명한 자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구에게는 그렇고,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으며, 절대적인 자유도, 절대적인 부자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절대적인 부자유에 가까운 극심한 부자유를 누리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처지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있으며, 소수의 당사자들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노동계약이 자유의지라는 일반화된 담론은 정당화될 수 없다. 누구의 얼마만큼의 자유인가? 그 자유가 왜 특정인에게는 박탈되는가? 왜 자유를 돈 주고 사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자유를 공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임금탄력성을 억제하고 모든 작업장의 일관된 안전보장을 위해 구조적인 관점에서 정책적으로 접근할 것인가? 정책적 접근을 위해 어떻게 하면 정치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가? 정치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개인 단위의 필요한 자원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자유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감사한 줄 알고 꼬우면 북한 가세요’와 같은 유치한 매카시즘 말장난을 대체하는 양식 있는 자들의 습관적 물음이 되어야 한다.







끝.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5-26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Pawel Czerwinski on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장애의 경제학적 파급효과를 제거하기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