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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3. 2021

최고이론은 없다

더 나은 POV가 존재할 뿐

오늘 저는 '모든 것을 한 방에 설명하는' 최고의 이론은 없으며, 마치 잠자리의 눈처럼 보다 많은 시야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철학과를 다니던 학부 시절 이야기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전쟁도 같은 민족끼리 하면 더 참혹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문도 같은 학문 안에서는 일종의 밥그릇 싸움이랄까요, 헤게모니 싸움이 아주 심하고는 합니다.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세균과 세균의 거리보다 세균과 인간의 거리가 더 가깝다"는 생물학에서의 표현처럼, 프랑스철학과 영미철학의 거리보다 영미철학과 공학계산기의 거리가 더 가까울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많은 차이로 인해, 철학과 학생들은 몇 가지의 더 세부적인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전통적으로 큰 강세를 띄고 있었던 독일철학 파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칸트, 셸링, 헤겔과 같은 철학자들을 지지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철학에 대해 아주 고전적이고 견고한 태도로 철학의 가치를 옹호하며, 우리가 언젠가는 닿을 수 있는 'ding an sich'(물자체)의 세계에 대해 탐구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완전한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승부사적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래서 자신의 학문적인 탐구와 성취에 대해 기준도 높고 자부심도 아주 강했습니다. 어떻게든 『순수이성비판』과 같은 책들을 정면돌파로 읽어내려는 근성도 대단했습니다. 그런 만큼, 레퍼런스를 정말로 철두철미하게 달아서 친구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지요.


독일철학의 굳건한 지지자들이 아주 견고한 태도로 말 그대로의 '진리 추구'를 하는 동안, 다른 한 켠에는 자유롭고 미학적인 태도로 철학을 즐겼던 프랑스철학파도 많았습니다. 독일철학이 '지지자'라면 프랑스철학은 '애호가' 라고 해야겠지요. 이들은 미학과에 온 것인지 철학과에 온 것인지 모를 만큼 아주 예술적이고 즐기는 태도로 들뢰즈, 베르그송,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푸코, 데리다 등 정형화할 수 없는 유형의 철학자들을 공부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고등학교에서 답답하고 억압적인 생활을 해 오다가, 실존주의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철학과로 오게 된 배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사진이나 음악 같은 취미가 하나씩은 있는 예술가들이었죠.


그리고 소수의 불교 전공들과 동양철학 전공들이 있었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깊이 관여해 있었던 한 줌의 영미철학 학파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수적으로는 가장 적었지만, 현대과학과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이라는 강력한 신무기를 들고 나와가지고는 인지과학 · 물리학 · 언어학 · 심리학 등 신규 이론들을 결합하여 기존 철학자들이 다루는 범위 저 너머에서 폭격을 가하고는 했습니다. 다른 철학의 지지파들은 저희보고 기겁을 했습니다. 철학적인 전제 자체가 아예 다른 과학을 갖고와서는 인지언어학이니 신경과학이니 하며 논점 이탈을 일삼는다는 비판이 주된 방어논리였지요.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저희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저희가 논점을 이탈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오늘날의 새 논점들을 따라잡지 못해 논점에서 낙오된 것이라고 비판했지요. 그리고 상대 지지파들에게 '도대체 진리를 찾겠다는 놈들이 논점 바깥으로 도망가는 게 어딨냐'며 '너희가 찾는 진리가 물리적 우주 속에 있기 때문에 우주를 이해하는 기술을 가진 우리가 필연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몰아붙였습니다. 


대학 내내 저희는 일종의 콜로세움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옛날이야기처럼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싸움은 정말로 진지했습니다. 교수가 강의하는 데 대놓고 "그거 틀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라고 면박을 주기도 하고, 강의실에서도 살벌하게 정색을 하고 논박을 하고, 철학적 가치평가의 차이로 조롱과 뒷담화는 물론이고 심지어 절교하는 사람도 있었고, 교수와 학생이 의견이 다르면 끝까지 으르렁거리며 싸우다가 결국 시험을 완전하게 잘 보고도 C+, B와 같은 점수를 받아나오기도 했습니다. 철학과의 콜로세움에서 우리가 찾던 단 하나의 궁극의 우승상품은 '진리'였습니다. '진리'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최고의 학문이나 학파가 있었고, 그 학문을 함으로써 진리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찾는 데 가장 적절한 이 학파를 보급해서 다른 무지몽매한 학파들을 '해방'시켜주려고 열심히 싸우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과 글로 치고박는 '신사적인' 시절을 보내고, 저는 좀 더 많은 학문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전혀 다른 학문들에게서 비슷하게 나타나는 이론 체계 트리를 보고, 또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전혀 다르게 기술하는 여러 학문들을 보면서… 제 목표는 조금 수정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찾는 것 자체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진리를 구해다 주는 하나의 최고 학문을 얻겠다는 생각은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더 나은 진리를 구해다 주는 학문을 찾으려고 배움의 범위를 넓힌 것이었지만, 더 많은 배움들을 알수록 최고의 방법 같은 없다는 것만 확실해졌습니다. 대신 학문들끼리의 관점의 차이들이 드러났고, 하나는 보지 못하는데 다른 하나는 볼 수 있는 보완점들과, 둘 모두가 각자 다른 언어로 기술하는 공통점들과, 분명히 이 부분에 뭔가 있을 텐데 서로 비춰주지 못하는 못하는 공통-맹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각자의 장단점이 있고 입장 차이가 있을 뿐' 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낳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론은 분명히 다른 학문보다 월등한 설명력과 타 학문에 대해 겹치는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심리학입니다.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세상 대부분의 대상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에도 심리학이 굉장히 많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의 원리는 정치학에도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건축학에도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둘이 단순히 중복되는 영역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정치학은 심리학의 하위 분파다' 혹은 '건축학은 심리학의 하위 분파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리학은 정치학에서 다루는 영역의 일부를 심리학 고유의 방식으로, 건축학에서 다루는 영역의 일부를 심리학 고유의 방식으로 다룰 뿐입니다. 정치학을 지배하거나 건축학을 지배하기에는 역량이 너무 모자랍니다. 모든 학문은 특정한 구성개념을 정의하는 기준과 방식이 다르고, 어느 구성개념을 가치있는 중요개념으로 간주하는 (연구자의) 동기도 다르고, 그 순서매겨진 구성개념이 한 계(system)내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긍정심리학도 정치학의 대상을 나름대로 다뤄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면 국제정치에 대하여 '강점 중심 접근'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핵미사일이나 도시 포격의 공포, 민족간의 증오 감정을 설명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부정적인 요소들을 통제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상황에서 발전과 재건을 위하여 투입되는 것이 긍정심리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적인 요소가 별로 없을 때 성장한 정치학의 노하우를 긍정심리학이 쉽게 커버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학문이 다른 하나의 학문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이런 것도 가능합니다. 건축학에 심리학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심리학에도 건축학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특정한 인간 행동의 이유들이 건축학자들의 눈에 보인다면? 심리학자들은 몰라서 풀 수 없지만 건축학적인 측면에서는 찾아낼 수 있는 심리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 있다면? 건축학자들 눈에만 보이는 심리법칙이 있다면? 그럼요. 그런 일은 실제로 자주 일어납니다. 결국 '심리학'이라고 해서 모든 심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건축학'이라고 해서 정말로 엄격하게 건축물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엄격하게 구획된 학문적 대상' 이를테면 '엄격한 건축물'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공통점은 존재합니다. 모든 학문이 동시에 포함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입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과 건축학은 '인간의 일로서 건축학' · '인간의 일로서 심리학'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학문은 그 주된 관심대상에 대한 인간의 통찰과 인간의 관점을 반영합니다. 비록 서로 다른 대상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결과물을 내지만, 사용하는 두뇌도 하나의 종류고 생산하는 통찰은 하나입니다. 모든 학문은 인간이 연루되어 있기에, 다른 학문과 소통할 수도 있으며 상호보완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다루는 한, 모든 학문들은 인간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론과 학문이 위계적으로 혹은 하나의 어떤 학문적 집합을 더 크고 메타적인 학문적 집합이 집어삼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학문은 한 줄기의 스포트라이트 빔과 같습니다. 그 빔이 한 각도에서 비춰줄 수 있는 것이 있고, 못 비춰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은 개인과 집단의 대략적인 행동은 예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특정한 어떤 집단, 아주 특정한 어떤 개인이 왜 그렇게 행동했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는 정치학이나 저널리즘이 훨씬 더 잘 보여줄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학문적 스포트라이트 빔을 모두 배워서 세상을 다각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가지나 사람이 하는 것이지 어떤 특정 학문이 제알아서 다각도적인 통찰과 지혜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은 종교인의 광신적인 악행을 확실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나 종교인의 광신적인 선행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신학자들은 종교인의 초월적인 행동을 아주 일상적으로 다룹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종교의 내재적 여성혐오나 극우주의와의 결합을 성찰할 수는 없습니다. 행정학은 이 거대한 나라들이 도대체 어떻게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에는 저항세력의 운동이나 사회개혁에 대한 이해는 크게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것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판사회학은 각각의 나라들이 어떻게 악행을 저지르고 인간이나 자연환경을 파괴하는지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비판사회학의 관점 안에서는 결코 의사결정권자들이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는 가정은 하지 않습니다. 지배자들이 내린 불가피한 이유를 들어주는 것이 비판사회학의 연구대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촌마을에 해군기지를 짓거나 원시림을 싹 밀어버리고 고속도로를 짓기로 결정한 관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까요, 아니면 다 변명일테니 일말의 가치도 없을까요? 이 질문은 아직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조명되지 않은 부분들은 다시 갈등관리학이나 탐사저널리즘과 같은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범위의 스포트라이트가 맡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만능 툴로서의 하나인 어떤 학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학문이라고 하는 게 어떤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성장하고 살아움직이는 베이비 드래곤 같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어떤 학문체계는 문서로 저장되고 생각 속에서 발휘되는 생각의 연결에 지나지 않고, 그건 결국 인간의 체험과 지식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이론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기대하고, 그런 하나의 최고 메타 이론을 찾는 것은, 전세계를 정복해 줄 베이비 드래곤을 찾아서 길들이겠다는 생각만큼이나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이론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된 서술문의 총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론이라는 하나의 스포트라이트 빔을 수도 없이 동시에 굴릴 수 있는 인간의 무한한 정신입니다. 좋은 이론도 있고 넓은 이론도 있지만, 그 이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을 머릿속에 넣어서 본인이 직접 생각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수단 중 하나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장용량이 거의 무한한 인간의 장기기억력으로 머릿속에 수많은 이론을 저장하고, 막강한 병렬 동시처리능력을 활용하여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론 자체를 개량해야겠지요. 그러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더 나은 최고의 이론에 집중하는 것에만 머물지 말고, 양적으로 더 많은 이론과 그 이론들의 차이를 살펴서 수많은 관점간의 차이를 자꾸 밝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하나의 대상을 비추는 빛과 빛이 사실 다른 방향에서 투사되었음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하나의 대상이 평면이 아니라 여러 그림자를 가질 수 있는 입체였음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여러 이론으로부터 투사된 빛이 드러내는 둘 이상의 차이가 있어야지만, 머릿속에서 하나의 통합된 상으로 만들어낼 때 우리는 대상의 3D 이미지, 혹은 삼각측량 좌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이론의 개수만큼, 더 풍부한 세상의 입체적인 면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이해의 폭은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새 울음 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면, 창 밖에서 우는 새 소리가 더 이상 단순히 '새 소리'라는 종류의 소리가 아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3D로 보셔야 합니다. 비교학문적인 접근, 비교연구적인 접근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정답을 알고 계시겠지요 그래서 정답을 말하고 싶으시겠지요. 오답을 말하는 놈들을 묻어버리고 싶으시겠지요. 참아야 합니다. 빨리 대답을 하려고 입이 근질근질한 것, 빨리 틀린 이론을 반박하고 싶은 욕구를 참아야 합니다. 맑스주의가 맞을까요, 신자유주의가 맞을까요? 대답을 참으세요! 대신에 세상을 3D로 보십시오. 식민지근대화론이 맞을까요, 식민지수탈론이 맞을까요? 대답을 참으세요! 대신에 세상을 3D로 보십시오. 일본군위안부는 완전한 노예제였을까요, 전시 공창제의 일부였을까요? 대답을 참으세요! 대신에 세상을 3D로 보십시오. 인권 정신과 페미니즘 실천이 맞을까요, 거기에 반항하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이 맞을까요? 대답을 참으세요! 대신에 세상을 3D로 보십시오.


명백하게 정당해 보이는 추궁과 궁색맞고 구질구질한 반론 - 그 지리멸렬한 충돌에서 비겁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용감하게 약자와 공공선을 위해 의견을 가지고 그 의견을 말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 하나의 숨은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싸움에 나갈 때에도, 이해하기 위해 섣불리 싸움에 나가지 않아야 하기도 합니다. 불가피하게 싸움에서 한쪽 편을 들더라도, 싸움 그 자체를 지성의 힘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싸움 그 자체에 귀중한 인간에 대한 통찰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한 쪽에 최종 승리 판결을 내리는 것은 시간이 해 주는 일입니다. 싸움터에 뛰어들어서 치고박는 것은 남들이 이미 많이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합시다.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그것은 머리를 쓰는 일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hoto by Erik East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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