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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루 Jun 06. 2021

왜 심리학인가?

심리학은 왜 과학이고, 왜 해법이며, 왜 중요한가?

인간의 마음이 가장 원시적인(low-leve) 단위에서 어떠한 기작을 통해 생성되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인류의 신경과학적 관측 기술이 뉴런 하나하나를 트래킹할 만큼 발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메모리에 ‘직접’ 접근하고 표기하는 로우 레벨 프로그래밍 언어(low-level programming language)를 모르는 사람도 Java나 C++등을 통하여 컴퓨터 작동에 개입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역시 뇌신경과학을 직접 다루지 않더라도 그것의 결과일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규칙적이고 일정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행동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에 접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심리학은 그것에 대답해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컴퓨터 프로그래밍과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다루는 개념에 상당한 제한을 걸어 두고, 심지어 먼저 ‘인간 정신의 가장 원시적인 레벨에서 그 현상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라고 못박아두는 까닭은, 우리가 심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하는 작업이 결코 어떤 진리나 본질을 알아낸 사람들의 선언으로 들리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걸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인간의 신경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보고 그것에 이름붙일(개념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서서히 제한적이지만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활동에는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훨씬 이전부터 이름붙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는 혈중 염증인자 측정이나 fMRI촬영술 등을 통해 뇌질환을 예측하거나 예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분자생물학적으로 너무 명백한 증거를 포착한 결과에 불과하다. 가령 아밀로이드-베타나 타우 단백질은 알츠하이머를 예견할 수 있는 지표 물질이다. 하지만 인간의 아주 복잡하고 전인적인 행동은 단지 그 단백질 크기보다 훨씬 더 미세한 단위에서 출현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 관측할 수가 없고, 원자 단위에서 인간의 뇌가 ‘측정 가능한’ 형태로 분포하는지도 사실은 불분명하다. 물론 나는 과학에 희망을 건다. 우리 과학이 언젠가 피험자의 생각과 미래 결정 방향을 실시간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리라고 보며, 그건 마땅히 응원되어야 할 멋진 프로젝트라고 생각한다. 우리 능력이 우리 자유와 행복의 한계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R&D만 하고 살 수는 없다. 한쪽에서는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여기에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 CT · fMRI · 두개강내 전극 삽입술 등의 직접적 두뇌 측정술이 오늘날 아무리 발전했다고 한들, 그 기술을 통하여 내담자가 애인이랑 헤어진 이유를 찾아낼 수 있는가? 희망을 읽고 스스로를 끔찍한 괴물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낼 수 있는가? 내담자가 오랜 친구랑 싸운 이유를 찾아낼 수 있는가? 자녀에게 폭력적으로 구는 양육자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뇌척수액에 떠다니는 어떤 단백질도 어떤 두뇌 생검의 절편도, 어떤 EEG 파형도 사람의 마음과 생각, 과거에 붙들려 있는 악몽, 나쁜 기억과 안 좋은 버릇 그 자체를 검출해줄 수 없고 치료해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5~1000×10-15 Tesla에 불과한 뇌신경세포 활동을 검출하기 위해 액체헬륨에 담궈서 초전도 상태를 유지하는 현대과학의 결정체인 30억원짜리 MEG(뇌자도, Magneto-encephalo-graphy)장비 같은 것에 환호하고 감탄하다가도 다시, 다시, 다시 심리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심리학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것이 교사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심리상담사가 존재하는 이유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보기에 심리학 · 상담학은 사주팔자나 역술인 따위와 구분할 수 없는, 말로 때우는 못미더운 행동이라고 비춰질 수 있다. 기초를 배우는 데만 10년이 걸리는 고등수학이 개입한 과학장비보다 더 ‘재래식’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심리학도 다른 학문처럼 객관적인 진리를 상정하고 접근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는 수많은 사이비 심리학, 심리학의 탈을 쓴 채 보수주의를 전파하고 동성애를 모독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독교 신학자들(이슬람도 동성애를 모독하기는 하지만 과학의 탈까지 쓰지는 않는다), 이라크 포로 고문의 효용성을 거짓 증거로 정당화하며 미국 국방부로부터 큰 돈을 벌어들인 심리학의 범죄자들, 과학자-임상가 모형(Scientist–Practitioner Model)을 존중하며 수십 년동안 심리과학 한 길만을 걸어온 명예로운 상담심리학자들과 임상심리학자들을 모독하는 사주명리 사기꾼들과 타로카드 점쟁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어두운 활약 때문에 과학자로서의 심리학자들 – 즉 ‘심리과학자’들이 일반인의 눈에 사이비 상담사들이나 종교인들과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심리학에 대한 정당성 질문을 받을 때면, 언제나 수학의 정당성 증명에 빗대어 설명하고는 한다. 수학은 규칙 안에서 성립한다. 예를 들면 2+3은 5이다. 그런데 왜 6가 아니고 5인가? 누가 그 규칙을 정당화해주는가? 즉, 수학에서 페아노 공리계나 ZFC공리계가 왜 다른 수많은 임의적인 공리계를 기각하고 현재까지 유일하고 절대적인 수학자들의 공통규칙으로 간주되는가? 바로 ZFC공리계가 보여주는 규칙이 우주가 보여주는 규칙과 일맥상통(Align)하기 때문이다. 실제 우주에서도 우유 2톤과 딸기잼 2톤이 섞여서 딸기우유 4톤이 될 때, ZFC공리계에서 2+2가 4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수학적으로 유비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 대한 관측의 변화에 따라 즉시 갱신하는 것. 그것이 이론이 ‘생각으로 우주를 모델링한다’고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인 것이다.


심리학도 마찬가지이다. 심리학은 현실에 대한 관측 결과를 수학적으로 유비하고 후속연구를 통해 공고히 함으로써 과학이 되었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현상들은 임의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실제 인간에게 반복적이고 뚜렷하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을 관측하고, 명명하고, 그렇게 명명한 구인(construct)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임상 및 실험연구를 통하여 구축된 과학적 체계화를 통해 태어났다. 오늘날들어 심리학보다 인간의 알 수 없는 행동과 복잡한 마음을 더 명확하고 일관되게 설명해주는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의 세련도를 얼마나 ‘최신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의 관점에서 보자면, 심리학은 더 이상 재래식 기술이 아니다. 심리학은 ‘주력 기술’이다. 복잡미묘한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기에는 PET · fMRI · CT 같은 고가의 기술들이 오히려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연구자 본인 노트북을 제외하면 전자기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심리학의 치료 효과가 오히려 현재까지 인류가 시도한 마음에 대한 개입 가운데 압도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은, 기술의 가치가 고도화된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의 개입 여부에만 단순히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물론 심리학에도 STEM 가운데 수학(Math)이 상당부분 개입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근본적인 목적 때문에 이론임에도 선한 목적의식이 융합된 (역학 · 보건학 · 사회복지학처럼) 학문내적 방향성, 통찰, 지혜, 임상적(경험적)근거, 새롭게 발견되는 현상(예를 들어 Wrist-cut Syndrome)에 대한 추적, 지역사회 가용자원의 개입, 치료자 인적 네트워크의 활용, 제도 및 사회사업과의 연계 등이 총체적으로 심리학의 연구 · 실천 모두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총체적 심리학 시스템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채택해야 할 학문적 도구로서 심리학을 중요하게 한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21-06-06 과제로 제출된 것을 보완한 것입니다.

Photo by Giammarco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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