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걸었는데 여태 이만큼 왔어?
화북동 용천수가 나오는 곳도 지났고 별도 포구에서는 돌로 쌓아 올린 별도연대(煙臺)에 올라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이 여기서 보초를 섰겠구나. 해안의 경계를 감시하는 연변봉수의 기능을 겸했다고 설명에 나와 있었다. 그러고서 오랜만에 등장한 제주 올레 18코스 총 길이 18.7km, 가장 중요한 현재 지점 ( ) km. 얼마쯤 왔을 거 같습니까. 오름도 두 개나 지났고 내내 구경하면서 온 거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걷기 중독은 아닌 게 분명하다. 중독은 그것만 하는 동작 아닌가. 게임 중독은 게임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게임'만' 한다. 알코올 중독은 술에 대해 오히려 모른다. 술'만' 찾기 때문이다. 무슨 술이든 그게 술이면 된다. 어디서 누가 만든 어떤 술인지 묻는 중독자는 없다. 언제, 누구와 마셨던 술이 달콤했던가, 슬펐던가 기억하는 사람을 중독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애호가다. 오직 걸음 다음에 걸음으로 길을 다 깔면 어디 숨이나 쉴 수 있을까. 해찰이 좋다. 헛짓거리가 나를 살린다. 멍한 채, 그것을 즐기려고 걷는 줄도 모른다. 그때 천사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무한정 엷어지고 얇아서 바닷물이라도 한 방울 튀면 다 젖어버릴 것 같은 투명한 날개가 바다 위로 반짝거려요, 그러면 웃지 않겠나.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겠나. 실컷 왔는데 기껏 7km? 그러면서 괜히 어깃장을 놓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중독은 그런 것이다. 그것만 보고 그것만 붙잡고 있으려고 한다. 서서히 주변을 질식시킨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말은 때때로 맞을 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얼마나 되뇌었던 말이었는지 대답하지 않아도 잘 안다. 삶에 중독된 사람은 처음과 같이 말할 것이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뒷 말을 입에 물고서 이번에도 다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마치 나를 웃겨 보려는 듯이 삶이 간지럽힌다. 자전거 한 대가 넘어져 있다. 저거 한 번도 타본 적 없지만 카드만 갖다 대면 탈 수 있는 거잖아. 따로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 갈등은 꼭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고 찾아온다는 말을 언젠가 써먹겠다는 마음으로 -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바로 세웠다. 너를 타고 훌쩍 달아나고 싶지만 지금은 걸어야 한다. 걷기로 했거든.
물과 기름은 물성(物性)이 달라서 경계를 이루고 섞이지 않지만 글과 길은 전혀 차원이 다른 성질의 것이면서도 자유 왕래를 하며 서로 돕는다. 10년을 매일 쓰고 있다. 쓰는 만큼 걷는지, 걷는 만큼 쓰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한 가지 내가 얻은 지혜는 쓰는 힘이 달릴 때는 걷는 힘이 뒤로 와서 밀어주며 쓰게 하고, 걷기 힘들 때는 쓰는 재미가 꼬리를 치며 앞에서 손을 잡아준다. 글과 길은 이름도 외 자에 ㄱ 성(性)을 나눠 가졌다. ㅡ와 ㅣ를 번갈아 즐길 줄 알게 된 내가 고맙다. 두 이름 모두 끝이 즐거운 ㄹ이다. 그 둘을 생각하면 기운이 없는데도 기운이 난다. 다시 김소월의 시 한 줄을 옮겨 적는다.
산새는 왜 우노, 시메 산골/ 영(嶺) 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 김소월, 산
화북 일동을 부지런히 걸어 동마을 복지 회관 앞을 지난다. 자그만 선착장이 거기에도 하나 있고 벌랑 포구로 곧장 들어섰다. 제주 삼양 3동 해변가 마을을 벌란(伐浪)이라고도 부른다. 물결치는, 파도치는 마을이 여기 벌랑이다. 게가 잘 잡히는 포구라고 했다. 지금은 텅 비었지만 4월이 되면 대나무 가지에 고등어 매달아 게 잡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라고 아저씨 한 분이 그윽하게 바다를 손짓하며 가르쳐 주셨다. 걷냐고 묻길래 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잠시 인연이 됐다. 통행증이며 신분증이 되어 주는 말이다. 걸어요? 네, 저기에 가는 길입니다. 참 간결하고 멋스러운 인사다. 검은 모래 해변, 삼양 해수욕장까지 걷다가, 어? 어떻게?
홍콩 배우 장국영이 불렀던 A Thousand Dreams of You를 부를 줄 알았다면 두 손으로 권총을 쏘아가며 of You, 그러면서 놀라고 반가워했을 것이다. 곤을동을 유심히 살피던 프랑스 사람 - 고백하자면 그녀가 반대편으로 멀어진 뒤에도 어색한 미소를 머금던 입가와 그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웃었던 눈이 사람을 궁금하게 했다. 또 고백하자면 나는 그녀가 입양된 한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한국적인 것들이 그녀에게서 흔들렸다. 한국 사람은 저렇게 수줍지, 한국 사람은 모른다는 말을 할 때 저렇게 미안해하지, 한국 사람은 ··· 여기를 서성거리지. Hello again, Never expected to see you here. 프랑스 여자가 웃었다. 한국 웃음이다. 삼양 해수욕장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앞으로 몇 년은 삼양 해수욕장 그러면 '라면'이 아니라 '프렌치'가 떠오를 것이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중간 스탬프를 찍는 정자에서 멈췄다. 그녀는 손을 흔들고 멀어졌다.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이 넓은 우주에서 '오늘' '두 번' 마주쳤다. 그녀의 사진기에는 어떤 것들이 찍혔을까. 나는 그녀를 찍었다.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물가를 서성거리며 물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그 알뜰한 낭만이 저쪽에서부터 눈에 들어왔었다. 여행자는 여행자를 동경한다는 제목이었다. 그녀가 그녀인 줄 모르고 찍었다. 프랑스 사람인 줄은 더욱 몰랐다.
그녀 덕분에 길을 놓쳤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만 따라가다 - 길이 하나밖에 없는데 - 화살표를 잃어버렸다. 그녀도 보이지 않고 잠시 중세의 기사가 나오는 유럽의 긴 골목길에서 도로로 나왔다가 방향을 잃은 소년 같았다. 한참을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든 것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다시 스탬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다가 가름 선착장에서 완전 우회전이었다. 해변을 벗어난 길이었다. 오르막이 나오고 집들이 나오고 버스 종점도 있었다. 저기서 버스를 타면 한 번에 숙소까지 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안다. 버스 안에서 후회할 것을. 어쩌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달라고 하차 버튼을 눌러댈지도 모른다. 우유부단은 그런 것이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그렇게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괴롭힌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도록 하자. 원당 요양원을 끝으로 주택가도 끝이 났다. 북해도의 목가적인 도로를 닮은 이 차선 도로를 걸었다. 지나가는 차가 한 대, 심심하면 시선을 돌려 뭉게뭉게 솟아있는 오름을 봤다. 발걸음 소리만 들리는 한낮의 고요는 모처럼이다. 정적 속으로 더 들어가는 옆길이 나오면서 닭머르 해안 길이 펼쳐진다. 갈대숲으로 들어가면서 그 생각도 들었다. 여자 혼자서 여행 다니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위험하겠구나. 겨울날, 외진 바닷가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것은 누구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그 낯선 사람이 좋지 않은 의도를 가졌다면 얼마나 위험하고 당혹스러운 일인가. 혼자서 하는 여행은 언제나 그런 위험이 따른다. 늘 조심해야 하는 까닭이다.
거기 파도치는 바위에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다. 바다를 좋아하던 아이야, 바다를 밤낮없이 새색시처럼 껴안고 살던 이야. 세상을 떠난 이의 영전에 바치는 시가 거기 새겨 있었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모르는 그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바람이 쉬지 않고 부는 바다가 무섭지는 않았을까. 바다를 그림처럼 아끼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닭머르 해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닭 머리를 닮은 바위가 있어서 알려진 바닷가다. 어느새 조천읍에 온 것이다. 조천읍 신촌리를 걷고 있던 것이다. 마침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가 전봇대에 걸려 있었다. 현재 지점 13km. 길이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 중독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겨우 마을로 들어서서 길가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커피 한 잔 마셔도 되는 시간이다. 커피와 소금빵을 사서 난로 근처에 앉았다. 테이블을 지날 때마다 시선이 느껴졌다. 이런 날씨에 혼자서 여기를 걷는다? 창가로 길게 붙어 있는 받침대가 1인용 테이블을 겸하는 구조였다. 거기 의자 하나에 배낭을 내려놓고 장갑이며 안경을 벗고 휴대폰도 꺼내놓았다. 데워서 내준 빵이 입안에서 포근했다. 카페라테도 한 모금, 온기가 돌았다. 신촌 선착장까지 얼마 안 되니까 거기서 오늘은 마친다. 신촌 초등학교 앞에서 325번 버스를 탈 수 있단다. 그것을 타면 숙소까지 직행이다. 잘 됐다, 오늘도 운이 좋은 편이다.
마을을 관통했다. 신촌 초등학교 앞에서 거리 앱을 켰다. 초등학교에서 18코스 종점 조천 만세동산까지는 2.4km였고 아까 신촌 선착장에서는 2.5km였다. 다음에는 언제가 될까. 신촌 초등학교 여기에서 버스를 내리는 날은 정말이지, 기약하기 어렵다. 식구들과 함께 걸으러 오는 날은 아마도 남쪽을 걸을 것이다. 지난해 5월에 걸었던 5코스 다음을 걸을 것이다.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르는 시간을 두고 약속을 하는 기분이었다. 말없이 끄덕이며 마을 길을 한번 돌아보고 저녁 버스를 탔다. 제주에 있는데도 제주를 떠나는 기분, 지난 5일 동안 정이 깊어졌음에 틀림없다. 점점 제주가 좋아지고 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