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 그린델발트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곳이 지구 상엔 생각보다 많다. 나에겐 스위스가 그랬다. 스위스를 떠올리면 짙푸른 초록색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맑은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들판, 그 위를 뛰어다니며 노닐 것 같은 어린아이들. 그래서 그곳에 가면 때 묻고 탁해진 마음마저 한없이 맑고 깨끗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책을 순수한 마음으로 듣던 소녀가 그곳엔 여전히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곳에 가고 싶었다.
빡빡한 일정과 예산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무리를 해서 스위스행을 택했다. 물론 내가 상상했던 초록의 스위스를 볼 수 있는 계절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끌림이 느껴졌다. 겨울의 스위스는 내가 상상했던 드넓은 초원이나 싱그러움은 없었지만 그 대신 따스한 온기와 아늑함을 물씬 풍겼다. 거리에는 연말과 새해를 지나 저마다 부푼 마음으로 일상을 거니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나무엔 이들의 염원이 담긴 노란 앵두알 조명들이 어여쁘게 걸려있었다.
"뭐할까 우리. 아쉬운 대로 중간까지라도 갈까?"
"그래!"
"저녁엔 환불받은 돈으로 맛있는 것도 먹자."
뽀드득- 뽀드득 거리는 눈을 밟으며 그린델발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우린 융프라우에 올라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드넓은 초원 위를 날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난밤 투어사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메일에 모든 일정이 하늘로 공중분해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기상청의 날씨 악화 예고로 금주 모든 일정은 취소 되었습니다. 예약하신 비용은 바로 환불 처리 도와드리겠습니다...'
눈을 비비며 메일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내가 해석을 잘못한 걸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겨우 3일 머무는 스위스에서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기다니.' 동심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괜히 떼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도착한 그린델발트에서 우린 인적이 드문 작은 길을 쫓아 언덕 위로 올라갔다. 한참을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지어진지 꽤 오래되어 보이는 집과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녹슨 자전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아마도 어린 날의 내가 읽었던 동화 속에서 주인공이 살고 있던 그런 집.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허름하지도 않은 그런 아기자기한 집. 곧이어 비슷한 집들이 나란히 줄지어 이어졌다. 언덕 아래는 내 손바닥보다 작은 기차들과 미니어처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고, 그 순간 주변의 모든 풍경들은 귀여운 장난감이 된 듯 현실의 경계를 넘어 나에게 왔다.
아무도 찾지 않을 법한 좁디 좁은 골목을 휘저으며 우리만의 스폿을 조금 더 찾기로 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어느 날 갑자기 모험을 떠난 공주가 미지의 세계에서 왕자를 만나는 그런 우연인 듯 필연 같은 공간 말이야.' 때로는 이런 소소한 재미가 여행의 아쉬움을 부족함 없이 달래준다. 아주 잠시 그 세계와 사랑에 빠져본다. 바람의 작은 떨림에 나부끼는 잎사귀와 슬로모션을 건듯 움직이는 사람들. 현실인 듯 현실이 아닌 것들이 묘하게 교차하는 찰나 순간들에 집중해본다.
해가 지고 거리의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 이마저도 낭만이 넘친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뾰족뾰족하기만 했던 마음에 무언가 날아와 앉았다. 일렁이는 촛불과 붉은 커튼 아래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 보글보글 끓는 퐁듀를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남아있던 작은 아쉬움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이럴 때 보면 나는 생각보다 단순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기하게도 여행 중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아쉬웠던 순간들에 대한 마음을 비교적 금방 털어버리곤 했다. 일상에선 노력해도 되지 않던 것들이 여행 중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되기도 한다. 어떤 모험이든 어려움은 있기 마련이고 결국엔 해피엔딩으로 끝날 테니까. 그러니 분명 오늘도 해피엔딩일 거라 믿었다. 동화 속에선 언제나 상상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마법과 같은 힘이 있으니 말이다.
주문 실수로 우리 앞엔 놓쳐진 4~5인분의 오일 퐁듀와 치즈 퐁듀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오늘 한번 배 터지게 먹어보지 뭐!'라고 말했다. 보글보글 끌어 오르는 치즈에 빵을 찍어 입안 가득 넣었다.
'이 맛이야, 내가 상상하던 여행의 맛,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맛.'
오늘의 여행이 아쉬웠던 이유는 그만큼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날의 우리에게 현실과 동화의 경계선이 없었던 것처럼, 마음을 쏟는 만큼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소중한 거다. 새삼 여행에 대한 나의 마음이 이렇게나 진심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나는 더. 더. 높이 하늘을 날고 싶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꿈을 꾸니까. 상상을 자극하는 동심의 세계에서 마음껏 날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스위스엔 드넓은 초원도 맑은 하늘도 푸른 나무들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고, 굶주렸던 마음의 숲 어딘가에 숨어져 있는 샘물을 찾아 떠난 모험에서 상상도 못 할 만큼 환상적인 것들을 만났으니.
이 여행의 끝은 새드엔딩 따위는 없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 후로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그런 해피엔딩 말이다.